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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손경희 (계명대학교)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102집
발행연도
2017.3
수록면
147 - 182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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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일제시기 영일수리조합의 설립과 운영을 살펴보았다. 영일수조는 1916년도에 경북 최초로 이주일본인 오쓰카 쇼지로(大塚昇次郞)의 주도하에 설립 · 운영되었다. 영일수조 구역은 연일 · 형산 · 대송 등 형산강 하류 지역이었다. 몽리 면적은 형산강 좌안 약 600정보, 우안 약 800정보로 모두 1,400정보였다.
영일수조는 수리시설 방식 가운데 양수기 중심의 수조로 계획되었다. 영일수조를 설립했던 오쓰카는 형산강 부근의 황무지에 주목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토지를 사들였다. 그는 형산강 하류에 수리시설을 만들어 개간을 하거나 방조제를 쌓는다면 방대한 경지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영일만을 통한 미곡수출을 보고 토지를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영일수조를 설립할 당시 오쓰카는 영일군에 논밭 이외에 국유미간지 6천 정보를 대여한 대지주였다.
영일수조는 설립 초기부터 문제가 있었다. 설계 부실로 인한 부채증가와 조합비 과다문제였다. 첫 영일수조 사업 자금도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차입했다. 기채 금액은 20만원, 이율은 년 1할이었다. 심지어 1915년도 및 1916년도에는 이자도 기채에 의해 지불되었다. 이후에도 영일수조의 설계가 불완전하여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부채가 급속히 늘어나 조합비가 고율이었다. 영일수조 조합비가 경북 수위를 점할 정도로 높았다.
결국 1927년 영일수조는 불량수리조합이 되었다. 영일수조가 불량수리조합이 되었던 이유는 첫째, 양수기 문제였다. 영일수조에서 설치한 양수기가 그 능률이 계획 예정 수량을 양수하기 불가능했다. 둘째, 창립 당시 공사시행법 불완전하여 간선수로의 누수가 많았다. 그 결과 몽리면적의 확장이 예정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셋째, 수해로 매년 수리조합 지구가 황폐화되어 조합비의 결손이 심했다. 조합채의 상환이 불가능했다. 영일수조의 연속되는 기채로 조합채가 매년 증가했다.
불량수리조합 구제 특별위원회에서는 영일수리조합에 국고보조를 지원했다. 연리 5분 1리의 저리 융자였다. 상환기간도 장기로 하여 조합의 부담을 경감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조합채의 증가로 영일수조는 부실화되었다. 1928년 영일수조 정리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경북 도청에서 영일수조 간부와 도당국자와 영일수조 채권자인 동척 대구지점장 小池英勝등이 모여 정리에 대한 협의를 했다. 그러나 영일수조 정리 자금 50만원을 총독부로터 지원 받기 어려워 정리가 어려웠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영일수리조합 설립이전 영일군 수리 관개 상황
Ⅲ. 영일수리조합 설립과 주체
Ⅳ. 영일수리조합 운영과 불량수리조합
Ⅴ.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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