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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정우 (배재대학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84輯
발행연도
2017.10
수록면
215 - 24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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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관은 1875년 7월 21일 수요일 탄생했다. 그는 20세기 전반에 난곡 송병화의 학문을 적통으로 계승한 유림의 지도자였다. 그의 학문은 우암-난곡으로 이어지는 춘추의리 정신을 계승한 것이었다.
송병관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망한 원인이 일제가 국권을 탈취한 흉계가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 잘못도 있고, 우리가 저들을 제어할 힘이 없는 것도 원인이라고 했으며,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의 변란이 원인이라고 했다. 그는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우리가 삼강오상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대한 제국은 망했지만, 비윤리적이며 비문명적인 정통성이 없는 ‘섬오랑캐’에게 강점된 것이라고 인식했다. 따라서 송병관에게 있어서 일제의 강점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이었다.
송병관은 일제의 호적 · 두발 · 복제 등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부정했다. 송병관은 1924년 2월 대전 남쪽 오도산 어청동으로 은둔했다. 그는 그곳에서 공부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제자를 교육시켰다. 제자교육은 봄 · 여름 · 가을에 했고, 교육 할 때의 생활은 사제일체의 실천이었다. 그는 그곳에 ‘극재’라고 이름 붙인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송병관은 대한제국의 일민이라는 인식을 잊지 않은 지성인으로서 일제의 민족말살에 저항하며 죽을 때까지 어청동에서 살았다. 그는 1945년 3월 21일 새벽 4시에 종명했다. 원수인 ‘왜’, ‘섬오랑캐’에 대한 복수설치를 이루지 못한 것과 사학의 오도가 진흥되지 못한 것을 恨으로 남긴 것이다. 그는 나라가 망하던 날부터 ‘의리는 무궁한 것’이라며 오도산 어청동으로 들어가 은둔할 것을 결심한 때부터, 종명하는 그날까지 자신의 확신을 평생 지키며 일제에 대해 비폭력 저항의 절의은둔을 실천했다. 이런 절의은둔의 모습은 유학자의 일제강점에 저항하는 또 하나의 모습으로 인정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가계와 학문연원
Ⅲ. 국망인식과 춘추의리론
Ⅳ. 일제의 민족문화말살 인식과 절의은둔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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