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鄭雲龍 (고려대)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70호
발행연도
2018.2
수록면
107 - 134 (28page)
DOI
10.21490/jskh.2018.02.70.107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낙랑군의 주민 구성은 기존의 연구 성과대로, 고조선 이래의 주민인 ‘土着朝鮮人’, 고조선 시기에 중국에서 이주하여 정착한 ‘土着漢人’, 낙랑군 설치 이후 이주해 온 ‘移住漢人’ 등으로 구분해 보았다. 낙랑군 멸망 이후 이들 집단의 향방을 추정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 중 ‘이주 한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자료로는 王禎・王基 등의 인물에 대한 중국 출토 墓誌銘이 있다. 이들 왕 씨 가문이 箕子계승 의식을 갖고 기자의 후손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 가문은 ‘이주 한인’ 출신의 낙랑군 遺民으로, 낙랑군 멸망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에 따라 정치적・사회적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가문이 기자를 계승한 왕손이라 강조하였다. 이는 가문 지위의 유지를 기도한 때문이라 보인다. 한편 10세기 편찬되는 『唐書』에 고구려 사회에서의 기자 유풍이 거론된다거나, 고구려 사회에 淫祀로서 箕子神의 숭배 풍습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점차 漢化된 낙랑군의 ‘토착 조선인’이나 ‘토착 한인’이 낙랑군 존속 시기에 자신들의 정통성 확보나 낙랑군 군현 통치의 필요성에서 제기된 기자 계승 의식을 보유하게 된 것에서 起因한다. 이들이 낙랑군 멸망 이후 고구려 사회에 포함되었고, 낙랑군의 중심지였던 평양 일원에서 고구려의 주민으로 생활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들이 기자신을 섬기는 집단으로 존속했던 흔적이 당서에 남게 된 것이라 이해한다. 또 3세기에 편찬되는 『三國志』의 濊에 대한 기록에는 기자의 8조 犯禁이나 기자의 유풍 및 호랑이 숭배에 대한 기사가 보인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왜 濊傳에 기자 관련 사항이 언급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울러 濊의 호랑이 숭배 풍습에 대한 사항도 사실의 언급 이외에 그 의미 추적은 거의 없었다. 濊는 부여에서부터 비롯된 고조선의 유민 집단이다. 단군신화에 보이는 호랑이가 바로 濊의 토템이었다. 단군신화에서 濊집단은 웅녀와의 혼인 관계에서 자신의 집단은 환웅으로 대표되기 때문에 호랑이를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濊집단이 동예로 이주한 이후에도 여전히 호랑이 토템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집단은 낙랑군 치하에서 한 때 영동 7현에 편제되어 東部都尉의 예하에 있었다. 동부도위의 통치는 아마도 ‘이주 한인’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주민의 대다수는 濊집단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호랑이 토템이 존속되었다. 이들이 바로 낙랑군 시절의 ‘토착 조선인’이다. 따라서 『삼국지』 濊의 기록은 예 지역에 ‘이주 한인’과 ‘토착 조선인’이 거주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판단한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中國으로의 移住集團
3. 樂浪郡中心地域에 殘存集團
4. 樂浪郡嶺東7縣地域에 殘存集團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8-911-00181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