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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鄭雲龍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65호
발행연도
2016.11
수록면
133 - 164 (32page)
DOI
10.21490/jskh.2016.11.65.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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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이나 묘지명에 보이는 낙랑 관련 인물의 성씨는 주로 韓氏와 王氏이다. 이들성씨는 『史記』 조선전의 韓陰과 王唊에서부터 찾아진다. 이들과 연관된 인물이 낙랑군 주민 중 ‘토착 조선인’에 해당한다. 낙랑군 시기인 기원후 30년 즈음에 난을 일으킨 王調도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한편 낙랑군 420여 년을 크게 前期와 後期로 구분할 경우, 전기는 國邑體制가 유지되어 토착적 성격이 드러난 사회라면, 후기는 점차 郡縣體制가 강화되면서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토착 조선인’의 漢化가 이루어진 시기라고 본다. 이때 낙랑군 지배를 위하여 漢에서 이주해 온 官人이나 대외무역에 종사하던 商人및 정치적 이유로 인해 도망해 온 사람 등 소규모 인원이 ‘移住漢人’으로 구분 가능하다. 한편 고조선 이래 중국 세력에서 벗어나, 고조선 사회에 정착해 있던 낙랑군 사회의 ‘土着漢人’들은 중국의 차별적인 정책에 의해 ‘逸民’이라 자칭하면서 자신을 위안했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후기를 경과하여, 낙랑군 멸망 이후 이미 漢化된 한 씨・왕 씨 등 낙랑 계통 ‘토착 조선인’ 성씨 집단은 慕容燕의 僑郡인 낙랑군 등 중국 사회로 이주해 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중국 왕조의 중앙 정치에 진출하여 활동한 존재로 낙랑과의 연관성을 내세우며 기자 계승 의식을 갖고 있었던 인물들이 있다. 이러한 인물들은 王波의 후손인 王禎・王基를 비롯하여, 王舒등이 묘지명을 통해 확인된다. 이들이 중국 北魏・北周왕조 때 왕실과 통혼하면서, 자신의 가문도 朝鮮侯였던 기자의 후손임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으로써 묘지명에 기자와 자신 가문의 혈연적 연계를 주장하는 기자 계승 의식이 남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낙랑군 존속 시기에 한씨나 왕 씨 집단이 기자 계승 의식을 갖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경우 『唐書』 등에 고구려에는 箕子神을 섬기는 淫祀가 있었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고구려가 낙랑 지역과 그 백성을 포섭하였음을 감안한다면, 낙랑군 당시에도 ‘토착 조선인’ 사회 특히 낙랑 계통 한 씨・왕 씨 집단에서는 기자의 존재를 자신 가문의 祖先으로 인식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낙랑군 당시에 크게 강조되지 못했을 것이다. 낙랑 계통 인물 또는 가문의 기자 계승 의식 강조는 6세기 초 북위・북주에서 왕실 인물과 통혼을 하게 됨에 따라, 자신들이 가계도 고대 조선의 왕실 가문이었음을 내세울 필요에서 비롯한 것이라 보인다.

목차

〈국문초록〉
1. 序言
2. 樂浪 關聯 人物의 姓氏 資料
3. 樂浪 關聯 姓氏의 實體
4. 樂浪 關聯 墓誌銘 箕子 繼承 意識의 實相
5. 結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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