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병준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78
발행연도
2015.6
수록면
139 - 183 (45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고에서는 최근 중국 호남성에서 발견된 里耶秦簡의 내용을 중심으로, 변군 내의 중심지역이 아닌 邊縣에서는 군현지배가 실현되기 어려웠다는 기존의 이해를 교정해 보고자 했다.
먼저 호구부를 통해 드러난 낙랑군 변현은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교통이 불편할 뿐 아니라 호구수가 매우 적은 곳이었으며, 또 호당 구수의 비율도 내군이나 낙랑군 군치지역에 비해 높다. 이러한 현상은 里耶秦簡에 나타난 秦代 洞庭郡 遷陵縣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이처럼 작은 변현이지만, 천릉현에는 縣廷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정밀한 행정 조직이 잘 갖추어졌고 이를 처리하기 위해 내군의 현과 비슷한 규모의 관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또 隣郡으로부터 初吏를 차출하여 배치하고 있었다. 이는 낙랑군 변현에 설치되었다고 알려진 諸曹, 그리고 遼東郡으로부터 충원된 初吏와 동일한 모습이었다. 이와 같이 낙랑군 변현과 동일한 조건과 규모를 가진 천릉현의 사례를 통해, 변군의 변현이라고 하더라도 縣廷 업무를 위해서 내군 혹은 중심지와 동일한 군현지배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존에 변현 특히 영동 7현과 관련해서 군현지배의 후퇴를 강조했던 또 다른 까닭은 한제국이 蠻夷의 침탈에 대응한 형식 및 그 군현지배의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먼저 토착민의 저항이 한사군의 개편을 불러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지역에 대한 군현지배를 약화한 것이 아니라 大郡과 합병하는 방식으로 변군의 과도한 부세 문제를 조정하려고 했던 것이 이른바 대낙랑군 형성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둘째, 이렇게 대낙랑군이 형성되면서 설치된 부도위는 군사방어의 영역이 넓어져 다시 추가 설치된 군사기관일 뿐이지 治民기관이 아니었다. 동부도위가 이곳의 군사업무와 행정업무를 모두 직접 담당했고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이곳에 대한 군현지배는 약화되었던 것으로 이해했던 것은 잘못된 이해였다. 셋째, 동부도위가 폐지된 이후에는 이곳의 지배가 포기된 것이 아니었다. 동부도위의 폐지는 이곳 토착민의 침탈때문이 아니라 전국적인 정책의 일환이었다. 도위 폐지 이후 王調의 반란 진압과정 중 영동 7현의 渠帥들이 후한에 항복해 왔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들을 영동 7현에 縣侯로 봉해주었다. 이 縣侯의 侯國은 이민족 거수에게 명목적으로 주었던 爵號가 아니라 열후에게 사여된 식읍으로서 여전히 郡으로부터 파견된 관리들이 행정업무를 담당했던 縣級 지방행정기관이었다. 즉 이들 縣侯는 군현지배에서 벗어난 자들이 아니라 군현지배체제 안의 존재였다. 적어도 고구려가 華麗城을 공격하는 118년까지는 군현제 하의 후국으로서 남아있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I. 머리말
II. 邊縣의 행정지배 : 洞庭郡 遷陵縣과의 비교
III. 동부도위 영동 7현 지배의 변천
I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8)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6-911-001686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