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백동인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42호
발행연도
2018.4
수록면
193 - 249 (57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新羅神宮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新羅本紀에는 炤智麻立干代(479~500)로, 祭祀志에는 智證王代(500~514)로 다르게 서술된 탓에 무성한 논의가 있었다. 현재로서는 신궁의 최초 설치는 소지마립간 대에, 제도적 정착은 지증왕 대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우세한 견해이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견해를 수용하여, 신궁의 설치부터 첫 親祀까지 과정을 검토하였다. 신궁은 기존의 최고 祭場이었던 始祖廟와 비교했을 때, 시조 赫居世가 갖는 天神의 면모를 강조하고, 왕을 비롯한 소수의 역할과 주도권을 강화하는데 최적화된 형태였다. 또한 제장과 제사를 설계하는 데 있어서 외래의 선진적인 문물과 기술을 활용하였다. 즉 신궁은 전반적으로 시조묘보다 발전한 형태의 제장이었지만, 이국적인 성격이 강하고, 왕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따라서 시조묘에 익숙한 신라인들의 반발을 살 소지가 적지 않았다.
射琴匣설화를 통해 실제로 신궁의 첫 친사가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존에는 사금갑 설화가 토착신앙과 불교의 대립이 정치적 갈등과 중첩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신궁 설치가 야기한 갈등은 토착신앙과 불교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토착신앙을 기반으로 한 국가제사 내에서 전통적인 시조묘와 외래 요소를 가미한 신궁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전통적인 시조묘 제사를 지지하던 세력이 신궁친사에 반발하였고, 그 결과 親王세력인 善兮夫人과 內殿焚修僧이 희생된 것이다.
소지마립간이 신궁 친사에 성공한 때는 설치 8년 후인 소지마립간 17년이었다. 소지마립간은 사금갑 사건이 발생한 후 불교·지방 세력과 거리를 두었다. 또한 반대 세력에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고, 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대신 소지마립간은 자연재해에 대한 대응으로 救恤과 같은 현실적인 사후처리가 아니라, 재해 발생의 원인과 왕의 역할을 강조하며 천신 제사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신궁 친사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소지마립간은 8년 만에 신궁 친사를 실행하였다. 소지마립간이 반대 세력과 타협한 결과, 지증왕 대에는 왕실 세력이 확장되었고, 국가 제도의 정비가 더욱 활발해졌다. 이와 같은 변화를 바탕으로 지증왕 대에 신궁의 ‘創立’, 즉 제도적 정착을 이룬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炤智麻立干 9년 神宮의 설치와 목적
Ⅲ. 炤智麻立干10년 神宮 親祀를 둘러싼 갈등
Ⅳ. 炤智麻立干 17년 神宮 親祀의 성공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86)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