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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태훈 (연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31호
발행연도
2018.9
수록면
285 - 319 (35page)
DOI
10.31218/TRKH.2018.09.131.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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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이 1922년 조선학연구를 제기한 것은 민족의 문명적 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민족부활의 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생각은 한말 이래 고민의 결과였다. 서구문명 추종만으로는 주체적 문명발전이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1920년대 최남선은 크게 세분야의 연구주제에 집중하였다. 첫 번째는 민족의 역사적 시련을 민족완성의 역사적 계기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단군과 고조선을 동아시아 고대문명의 구심점으로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고조선의 문화유산이 민족의 생활과 신앙에 계승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최남선은 고조선을 불함문화권이라는 고대 동아시아문명의 중심국가로 입증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최남선의 연구는 커다란 호응을 이끌어내었다. 일본학자들의 단군조작설을 반박하고 민족의 역사적 기원을 동아시아문명의 기원으로 재정립 했기 때문이었다. 민중의 호응과 함께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의 지지도 얻어내었다. 민족적 단결을 강조하는 그의 주장이 사회주의세력의 사상공세에 대처할 사상자원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객관성을 결여한 연구방법론과 문명개화론과 다를 것이 없는 사상적 메시지 때문이었다. 그를 지지하던 민족주의 지식인들조차 그의 연구를 과학적 연구로 평가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자들은 관념적 연구라고 비판하였다. 대중적으로는 인기가 있었지만, 민족운동 안에서 그의 역할은 거의 사라졌다.
정력적 연구활동에도 불구하고 민족운동 내에서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최남선은 조선사회와 민족운동계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민족적 부활을 기대하면서도 실천방법을 절실히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적 사대주의 때문에 민족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하는 노력들이 좌절되었다고 비판하였다. 나아가 당분간 현재사항은 개선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단군과 고조선을 사상적 지표로 정립하려 했던 시도가 한계에 직면하자 조선사회에 대해 깊은 좌절감을 갖게 된 것이었다. 민족운동과 조선사회에 대해 기대를 접은 그는 1928년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함으로써 이런 생각을 행동으로 표출하였다. 조선민족의 문명사적 위상을 증명하여 민족자립의 원리를 제시하려 하였지만, 그러한 활동이 한계에 부딪히자 조선민족의 주체적 능력을 부정하고 일본중심의 동아시아문화론으로 흡수되어 간 것이었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1920년대 조선학 연구의 배경과 문제의식
Ⅱ. 조선학 연구의 시각과 내용
Ⅲ. 조선사회의 반응과 실천적 귀결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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