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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京燮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32호
발행연도
2018.12
수록면
231 - 265 (35page)
DOI
10.31218/TRKH.2018.12.13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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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세기의 금석문과 목간 자료를 활용하여 신라 촌락의 내부구조와 그 실상을 해명하기 위한 연구이다. 먼저『포항중성리신라비』의 시기인 麻立干시대의 촌락사회는 在地首長의 인격적인 지배가 유지되고 있었으나, 외부적으로는 신라 6部에게 정치적 · 경제적으로 의존하면서 貢納과 奉仕의 책임을 다하는 복속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재지사회의 정황은 6세기 들어 더욱 활발해진 계층 분화에 따른 촌락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6부 체제를 극복하면서 등장하는 신라의 새로운 권력구조에 직면하게 되면서 변화를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촌락의 공동체적 질서 속에 존재하던 사람들을 신라국가의 公民으로 개인화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었다.
성산산성 목간의 本波 · 阿那 · 末那 · 前那등의 용례는 村 내부적인 地域(區域) 방향과 범위를 나타내는 용어였으며, 이것은 곧 촌락의 분화양상과 구조를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한 표기였다. 당시 신라의 촌락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그 자체 불균형적인 성장과 소멸의 과정을 경과하고 있었으며, 국가는 이같은 변화를 예의주시하면서 촌락사회의 안정적인 지배를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취의 과정에서 제작된 성산산성 목간에 이와 같은 촌락 내부의 현상이 기재되었다는 것은 국가권력이 지배의 시선에서 촌락공동체 내부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촌락과 촌락민의 경제력등의 처지에 따른 세액의 차등 부과와 민과 노인의 공동 납부 등의 양상은 당시 신라 국가가 村落의 현황과 내부 民의 정치경제적 사정까지도 파악하고서 수취를 진행하였음을 지적하였다.
『포항중성리신라비』의 분쟁 사실은 여전히 공동체적인 운영원리가 촌락민을 강하게 규정하는 가운데 국가가 財의 분쟁 등에 개입하면서 재지수장층을 정점으로 공동체적 성격이 내부화된 촌락사회를 분해해가는 과도기적인 시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단양적성신라비』의 赤城烟이나 성산산성목간을 통해 볼 때 6세기 중엽의 신라에서는 촌락민들에 대한 기본적인 戶口조사가 이루어져 개별적 인신지배가 상당히 진전되었음을 밝혔다.
6세기 신라의 촌락 구조는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하였으며, 여러가지 사정으로 촌락 자체는 분화하고 있었다. 촌락사회의 이러한 변동은 고대국가의 중앙집권화 과정에 연동하여 그 내부적 변화를 경과하였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촌락사회 내부의 자체적인 변화도 간과할 수 없다. 6세기 촌락은 首長과 民의 관계를 중심으로 내적인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경과하면서 신라 국가라는 外力과 끊임없이 拮抗하였고, 그 결과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공동체로서 존재하였다고 보인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포항중성리신라비의 村落과 宮
Ⅱ. 성산산성 목간의 촌락과 수취
Ⅲ. 節居利와 也尒次, 촌락의 사람들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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