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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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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신선영 (문화재청)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301號
발행연도
2019.3
수록면
67 - 92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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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에 활동했던 신윤복과 그의 풍속화는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기록되면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1910~20년대 간행된 『조선서화가열전』, 『근역서화징』에서는 신윤복의 약력과 풍속화에 능했다는 사실을 서술하였고, 1930년대 간행된 『조선명화전람회목록』, 『조선중앙일보』 등에서는 신윤복의 풍속화에 대해 ‘조선풍속화계의 백미’와 ‘부세회풍(浮世繪風)’이라는 해석이 이루어졌다. 하층민들의 생활 풍속을 그린 신윤복의 풍속화에 대해 ‘조선풍속화계의 백미’라는 평가는 1938년 『문장』에서 김용준의 ‘가장 위대하고 혁명적 정신이 풍부한 작가’라는 신윤복 극찬으로 이어졌다. 또 신윤복의 풍속화의 ‘부세회풍’이라는 해석은 ‘여속을 그린 신윤복’을 주목케 하였고, 1939년 문일평의 『호암전집』에서 언급한 신윤복이 “너무 비속한 것을 그리다가 도화서를 쫓겨났다”라는 언급은 ‘여속화가 신윤복’을 더욱 공고케 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신윤복의 풍속화가 일제강점기 정치·사회적 요구와 대중들의 심미 취향에 맞추어 선택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특히 1930년대 《혜원전신첩》이 공개되면서 신윤복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의 평가와 해석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신윤복의 풍속화는 조선 전통에의 향수로서, 에로티시즘적 이미지로서 일반에 소비되었다.
특히 신윤복의 풍속화에서 에로티시즘적 이미지의 부각은 신윤복 풍속화의 모방작들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혜원전신첩》 <이부탐춘>을 모방한 그림이 포함된 헤르만 산더의 《풍속화첩》, 《무산쾌우첩》, 최우석의 《운우도첩》, 《속화첩》 등의 예처럼 《혜원전신첩》 도상의 유통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 이루어졌고 급기야 춘화첩의 모티브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신윤복과 《혜원전신첩》이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자 신‘ 윤복’ 또는 ‘혜원’이라는 이름으로 춘화첩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신윤복 풍속화의 에로티시즘적 이미지는 더욱 강화되었고 지금에 이르러 신윤복이 여속화가·춘화가로서의 평가를 얻게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목차

Ⅰ. 서론
Ⅱ. 일제강점기 기록에 나타난 풍속화가 신윤복
Ⅲ. 일제강점기 신윤복 풍속화의 유통
Ⅳ. 일제강점기 신윤복 풍속화의 모방과 재평가
Ⅴ. 결론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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