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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영헌 (고려대)
저널정보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서울학연구 제75호
발행연도
2019.5
수록면
63 - 91 (29page)
DOI
10.17647/jss.2019.05.7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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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이 수도로 정착되는 역사적 과정에는 수많은 갈등과 타협이 발생하였다. 특히 명대 영락제(永樂帝)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천도한 이후에도, 북경이 사실상 유일한 수도로 정착되는 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홍희제(洪熙帝)가 ‘남경(南京)으로의 환도(還都)’를 결정하고 20년 가까이 명나라의 개창자인 홍무제(洪武帝)가 선택했던 남경과 영락제가 새로 선택했던 북경 사이에 물밑 경쟁이 이루어지다가, 결국 1441년 북경이 수도로 결정이 되었다. 본 논문은 이 과정을 북경이 ‘이민족의 수도’에서 ‘한족(漢族)의 수도’로 변용되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한족사회가 몽골적인 요소가 담긴 북경을 ‘유일’한 수도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논쟁과 도시의 중층적인 성격을 규명하였다. 특별히 이 시기에 진행된 수도 공간의 재편을 통해 기존의 이민족 수도의 이미지가 한족의 수도로 덧입혀지는 과정을 고찰하면서, 북경에 다양한 이종성(異種性, heterogeneity)이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북경 천도 이후부터 정도(定都)까지의 과정 및 그 결과 형성된 도시 구조의 중층적 변용은 남북통합의 표상을 상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년 가까이 ‘남경파’와 ‘북경파’의 물밑 경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북경의 도시구조는 ‘이민족의 수도’와 ‘한족의 수도’가 지닌 요소가 복합적으로 절충되었다. 이것이 절충되고 조정되는 명 시대를 거쳐 북경은 비로소 남과 북을 연결하는 화이(華夷) 통합의 수도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를 통해 명 북경은 그야말로 유목세계와 정주세계를 연결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조건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러한 명 북경의 수도성을 그대로 계승했던 청조(淸朝)가 이를 변용하여 다민족성을 담지한 수도로 한층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목차

1. 머리말 : 북경의 首都性에서 ‘이민족’과 ‘한족’을 구분하는 의미
2. 洪熙帝의 ‘回鑾’ 결정에서 正統帝의 북경 定都까지
3. 도시 구조의 중층적 變容
4. 맺음말 : 남북통합의 표상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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