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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석당논총 석당논총 제61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39 - 166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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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은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의 최고 문장가였지만 여타의 문인들에 비해 한시는 많이 짓지 않았다. 평소에 그가 한시 짓기를 그리 즐겨하지 않았고, 그가 지었던 한시 작품도 보관이 잘 되지 않아 현존하는 한시 작품들은 모두 50수 정도이다. 그러나 박지원의 한시 작품이 이루어낸 문학성은 일찍부터 그의 문장들 못지않게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현존하는 박지원의 한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古調 장편의 작품들이다. 그의 古調 장편 작품들은 모두 매우 긴 편폭으로 구성되어, 탁월한 문장가로서의 필력과 역량이 한시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고 하겠다. 박지원이 시를 즐겨 짓지 않았다고 하지만, 때에 따라 거침없는 필력으로 도도한 氣勢의 장편을 만들어내는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박지원은 한시를 지을 때 근체시의 격률에 얽매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律詩와 絶句는 그 형식의 구속으로 인해 가슴속의 말을 자유롭게 쏟아낼 수 없어 항상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는 근체의 율조를 벗어나 古風으로 여러 편의 작품을 창작해 냈다. 박지원이 써낸 단형의 고체 작품들은 그가 평소 지향한 ‘朝鮮之風’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는 󰡔嬰處稿󰡕에 서문을 쓰면서 李德懋가 조선의 森羅萬象을 시편에 담아내었으니 그것을 ‘朝鮮之風’이라 부를 만하다고 말했다. 李德懋의 시에서는 우리나라 말을 시로 적고 민요에다 운을 달아 자연스런 작품을 이루었던 점을 지목했는데, 박지원 스스로도 그의 시작품에서 우리말을 한자로 옮겨 적거나 우리나라만의 풍속을 작품에 그려내고자 하였다. 박지원은 근체시의 격률에 구속되어 詩想을 자유롭게 펼치지 못하는 것을 싫어하여 근체시를 짓다가는 그만두어 버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러나 박지원도 조선 시대를 살았던 문인이라 修學期에는 과거를 염두에 두면서 근체시 형식의 작품 쓰기를 배제하지 않았고, 燕行 시기에도 근체의 작품을 많이 썼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燕巖 集󰡕에는 고체시보다 근체시 형식의 작품이 더 많이 남겨져 있기도 하다. 박지원의 근체시는 5언보다 7언의 작품이 많아, 그가 근체시를 쓸 때 7언의 형식을 더 선호했다고 이해된다. 7언은 5언보다 글자 수를 더 많이 쓸 수 있어서 가슴속의 회포를 막힘없이 드러내기에 한결 편리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의 한시 작품에서는 寫實적 繪畫性이 두드러진 典實함의 풍격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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