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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민족문화연구 제40호
발행연도
2004.1
수록면
73 - 98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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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시대 유산기 데이터베이스의 현황을 보고하고, 이를 토대로 유산기의 시공간적 추이와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본 과제에서 구축한 유산기 데이터베이스의 총 작품 수는 347편이다. 이 중 금강산 유산기가 작품 전체의 15%에 해당하는 51편이나 된다. 금강산 다음으로 많은 유산기를 남긴 산은 지리산, 가야산, 청량산, 삼각산 순이다. 그러나 금강산, 지리산에 비하면 작품 수가 현저히 적다. 조선시대의 산 가운데 유산기를 남긴 산은 모두 134개이다. 그런데 유산기를 남긴 산의 78%가 1, 2편 정도의 유산기를 남겼다. 여기서 몇몇 산을 제외한 유산의 대상지가 대부분 작가와 개인적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지 산과 중세적 주체, 산과 유산기 간의 시대적 일반항이 성립하여 있었거나 성립해 갔던 것은 아닌 듯하다. 유산기 창작의 시대별 추이를 고찰해보면, 15세기 전기에는 작품 수가 매우 적었으나, 16세기부터 조금씩 증가하다가, 17세기와 18세기에 급격히 증가한다. 15세기 유산기의 작품량은 문집의 간행 여부, 소실 여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6세기 전기에는 두 차례의 사화로 김종직의 문인들이 대거 제거를 당하여 작품수가 현저히 감소하였으나, 16세기 후반기에는 유산기 작품이 크게 증가한다. 주희, 장식, 임용중이 남악 등반 때 지은 창수시를 엮은 명판본이 수입되면서 장식의 서문과 주희의 발문이 산수유기의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17세기 이후 유산기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은 16세기 후반기 이후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에게 유산이 학습과 수양의 실천과정의 하나로 크게 부각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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