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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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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석당논총 석당논총 제66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 - 3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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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의 영산읍성에 대하여 문헌자료와 그간의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축성의 의미와 읍성의 특징과 구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조선시대에 축조된 읍성은 대부분 연해읍성으로서 왜구 방비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지에 속하는 영산지역에 읍성이 축조된 것은 영산지역 역시왜구의 침입이나 일본과의 관계가 활발했던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성종 8년(1477) 하삼도의 축성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영산지역이 양산, 밀양 등과 함께 읍성축조의 대상지역으로 선정되었다. 즉 영산지역에 읍성을 축조한 것은 내지라 하더라도 일본인이 낙동강을 따라도달할 수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비하기 위한 축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읍성의 특성과 그 구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영산읍성의 위치는 경남지역이 신라에 의해서 복속된 이 후에 축성된 성곽과 동일하며, 읍성의 배후산성은 영축산성이다. 그리고 형태는 평산성이며, 평면 형태는 전형적인 주형에 해당하는 거제 고현성과 달리 산정상부로 이어지는 부분이 상당히 좁다. 영산읍성 성벽의 축조수법은 조선시대 전기의연해읍성과 유사하지만 지대석 기저부에 부석을 하지 않은 점은 특이하다. 이와 더불어 영산읍성과 조선시대 읍성 및 영진보성을 비교하였는데, 그 결과 이 시기의 성벽 기저부 조성은 크게 말목으로 지정한것과 원지형을 ‘L’자나 ‘ㄩ’자상으로 굴착한 뒤 내부에 할석을 채우는형태, 그리고 이 두가지를 혼용한 것 등으로 다양함을 알 수 있는데, 시기적이나 지역적인 특성은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읍성 및 영진보성의 성벽 기저부는 지대석을 둔 구조이지만 조선후기에는 별도의 지대석을 두지 않고 성벽을 쌓는 방향으로변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성벽의 지대석은 사직선과 수평기단으로 나누어지며, 전국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사직선기단에서 수평기단으로 변화한다고 보기 어렵고 한양도성 성벽의 영향일 가능성이높음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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