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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46권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209 - 244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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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실정을 내정개혁 실리외교로 미화하며 폐모론을 반대하고 인조반정을주도하며 척화를 했던 세력을 폄하했던 기존의 연구를 시정하기 위하여, 선원 김상용을 개혁을 주도한 정치가로 재조명하였다. 선원 김상용은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의 제자로 서인의 핵심이 되어 선조·광해군·인조 대를 주도해간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다. 선원은 명종 16년(1561)에 태어나 선조 23년(1590) 10월 급제하여, 12월에 한림에 뽑히고, 선조 24년 2월 승문원 부정자, 6월 예문관 검열이 되어 출사를 시작하였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을 당해서는 송강 정철의 종사관이 되어 의병을 모아 왜란에 대처하면서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정랑, 승정원 승지 등 요직을 거치면서 선조대를 주도해갔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끝나고 북인이 정권을 주도해가자 왜란에 대응해 싸웠던 이귀 등 서인 세력과 함께 지방 수령으로 밀려났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 부인의 이종사촌으로 왕실과 가까워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광해군 5년 계축옥사 연루되었지만 왕실하고 가까워서 모면하고 한직으로 중앙정계에 남았다. 그러나 광해군 9년 외삼촌 정창연과 함께 폐모론을 반대해재야로 내려갔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서인이 정권을 주도하자 서인 중 노서(老西)의 영수로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10만 양병을 추진해가며 여진의 침략에 대처하면서 정계를 주도해갔다. 그러나 십만양병을 하기도 전에 인조 14년 병자호란을 당했고, 인조 15 년 강화도가 함락되자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이러한 선원 김상용의 충절은 효종대 북벌론으로 이어지고, 숙종대 5군영이 완성되어 부국강병한 자주적인 문화국가를 이루는데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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