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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대동문화연구 제94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21 - 172 (5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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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이씨는 고려 초의 벽진장군 李悤言의 후손인데 역관의 계통이다. 19세기 중반에 󰡔금산이씨세보󰡕를 간행하고 李愉의 가계 157명을 수록하였는데, 성관 집단이면서 한 파로 구성되어 派名이 없다. 족보에 嫡庶를 표기하였다. 17세기 이후 서얼통청 등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지만 이 족보에서는 士族의 족보와 동일하게 존비 귀천 의식이 남아 있다. 이 족보에서 외손・외증손의 妻父와 외손서・외증손서의 父名까지 표기한 것은 타 족보에서 보기드문 사례가 되므로 자신들의 신분적 영역을 굳게 고수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족보를 간행할 때 역관 가문으로서 결속을 다지고 족세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족보 편성시 命字 항열 6명을 포함한 31명의 가계에서 수단을 내지 않은 것은 18세기 사회의 士族 우위 풍조에서 중인 차별이라는 문제 인식에서 나온 한계가 아닌가 한다. 최초 역관 李愉는 자손 12대까지 연이어서 총 66명의 역과 합격자를 배출하여 조선시대 역과 합격수 10大 姓氏 안에 들었다. 또 합격자 가운데는 壯元 7명, 5子 합격한 1가구 등이 있었고, 종1품에 오른 자는 6명이었다. 역관들이 가장 영예롭게 여기던 敎誨의 직에 선발된 자가 32명으로 합격자의 48.5%를 점하였다. 이 가문의 업적을 요약하면, 李愉는 임란 때 임금을 호종한 후 倭都에 들어가서 4년간 公務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李後勉은 燕京에 들어가서 禁書를 구하여 조정에 올렸다. 李樞는 연경에 33번 가서 奏請 6번 성사시키는 등 역관의 소임을 다하였고, 특히 󰡔明史󰡕에 인조반정 기록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데도 기여하였다. 李洙는 󰡔朴通事新釋󰡕・󰡔重刊老乞大󰡕의 간행과 󰡔捷語新語󰡕・󰡔通文館志󰡕에 序文을 쓰는 등 사역원의 주요 서적을 간행하는데 공헌하였다. 李埜는 󰡔금산이씨세보󰡕를 간행하였고, 李瀷은 󰡔蒙學三書󰡕의 重刊序를 지었으며, 李應憲은 󰡔華音啓蒙󰡕을 편찬하였다. 李琦는 유럽 6개국의 외교를 폈다. 통혼의 경우, 중인 신분층과 철저히 혼사를 하였고, 혼사를 맺은 성씨는 37성씨 89본관인데 겹친 혼사가 많았다. 사돈 중에는 역관 시인으로 저명한 李尙迪과 우봉 김씨의 기반을 다진 金益瑞가 주목되었다. 사위의 가계를 살펴보면 전체 355명 가운데 역과 합격자가 78명이므로, 사위・외손들 역시 역관의 가계를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醫科, 籌學 출신이 늘어나고, 雲科・律科의 합격자가 나온 점으로 보면 사위・외손 가계에서 다양한 전문 기술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금산이씨는 역관가문으로 이어오면서 조선시대 중국, 일본과 외교를 다지는데 기여하였고, 구한 말 새로운 문명이 대두하던 시기에는 내・외 후손들이 정치, 외교, 사회, 종교, 예술, 문화, 출판 등 각 방면에서 당대 신지식인으로서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 점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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