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미국 북장로회에서 임명한 한국의 첫 목회 선교사로서, 한국의 개신교의 초기 정착 과정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했던 호러스 G. 언더우드의 가족 배경, 교육 배경, 그리고 선교사 지원 및 내한 과정을 다루었다. 이 연구를 위해 미국 장로회 역사협회에 소장되어 있는 다양한 1차 사료, 영국과 미국에 산재되어 있는 총인구조사, 신문 기사, 그리고 언더우드가 다녔던 뉴욕대학교, 뉴브런즈윅의 화란개혁신학교와 관련된 자료 등 아직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여러 사료들을 이용하였다.
그동안 언더우드에 관해 적지 않은 연구 논문들이 발표되었음에도 정작 그의 집안 배경, 교육 배경 및 선교사 임명 과정에 대해서는 극히 제한된 자료가 반복되어 인용되어 왔다. 제한된 자료는 바로 1909년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 25주년을 기념하여 언더우드가 자신의 내한과 관련하여 회고한 것과, 언더우드의 사후 부인 호튼이 저술한 Underwood of Korea에 포함되어 있는 언더우드의 집안 배경을 말한다.
내한 이전 언더우드와 관련하여 이 연구에서 밝혀진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언더우드의 생모 및 계모와 관련된 측면이다. 호튼이 기술한 바와 같이 언더우드의 생모는 ‘현모양처’였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생모 못지않게 계모도 언더우드 집안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남편 존이 1872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1년 동안 런던에 남아 아이들을 양육했고, 특히 언더우드와 형 프레데릭이 프랑스의 가톨릭 기숙학교로 유학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언더우드의 교육과 관련된 측면이다. 어려서부터 ‘목사 및 선교사’가 되고 싶었던 언더우드는 아버지의 배려로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았고,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는 저지 시(市)의 명문학교인 해스브룩학원에서 교육을 받은 후 그로브개혁교회의 신자가 되면서 담임목사 메이본으로부터 그리스어를 사사 받았다. 언더우드가 뉴욕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의 교육열, 메이본 목사로부터 받은 사사, 당시 뉴욕대학교의 등록금이 무료였던 점 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언더우드는 특히 웅변에 남다른 재질을 보였으며, 다양한 활동을 통해 뉴욕대학교의 ‘훌륭한 학생’으로 인정받았다. 화란개혁신학교와 관련하여 언더우드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메이본 목사와, 언더우드가 다니던 뉴브런즈윅 제1개혁교회의 목사 이스턴이었다. 언더우드는 이스턴을 도와 각종 부흥회에 참석했고, 2학년을 마친 여름 방학에는 담임 목사가 없었던 폼프톤 교회에서 활동하면서 담임 목사 이상으로 교회를 부흥시켰다.
셋째, 언더우드의 선교사 지원과 관련된 측면이다. 언더우드는 1909년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 개시 25주년을 기념하여 자신의 선교사 지원과 관련하여 회고를 한 바 있으나, 그 내용이 자신의 선교사 자원 편지에 담긴 내용과 다른 부분이 많다. 이 연구를 통해 제기된 의문은 1) 언더우드가 한국을 알게 된 시기가 불명확한 점, 2) 자신은 인도 선교사로 소명을 받았고 그 준비를 했다는데, 미국 북장로회로 보낸 선교사 지원 편지에 이런 내용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자신이 속해 있는 개혁교회 선교본부는 중국 아모이(厦門) 선교부로 파송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점, 3) 언더우드가 과연 1년 동안 의학 공부를 했었는가 하는 점, 4) 화란개혁교회에 속한 언더우드는 장로회나 감리회의 한국에 대한 선교 계획에 대해 잘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 5) 자신이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된 것이 갑자기 떠올랐던 생각들 때문이었다는 회고는 너무 주관적인 것이며, 자신의 선교사 지원 편지에는 이수정의 호소에 의해 마음이 움직였다고 적었다는 점 등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이 연구는 새로 발굴된 일차 자료에 근거하여 언더우드의 내한 배경 및 과정을 보다 객관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저자가 아직 찾지 못한 자료가 더 있을 것이고, 또 자료 해석에 있어 미진한 부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 도입사에 너무나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언더우드에 관해 극히 제한된 자료를 이용했던 기존의 연구를 넘어, 보다 명확하게 언더우드를 이해함으로써 130년 전 내한했던 그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By analysing newly discovered primary materials, the familial and educational backgrounds, and the appointment as a missionary to Korea of Horace G. Underwood were reexamined.
Newly discovered facts are as follows: First, about his biological mother and stepmother. His stepmother al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Underwood family after John's left in 1882.
Second, about educational background. Admission of Horace to NYU may have been possible due to support from people around him, such as his father, who had a passion in his son’s education, from valuable teaching by his pastor Mabon, and from NYU’s free tuition policy at the time. There are two peoples who were very important to Underwood regarding the 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Rev. Mabon and Thomas C. Easton, a pastor of the New Brunswick First Reformed Church.
Third, about Underwood’s application for missionary to Korea. This study raises the following five questions. 1) What was the exact date when Underwood first recognized Korea? 2) To which field Underwood had prepared to become a missionary? 3) Did Underwood study medicine for a year? 4) Whether Underwood had been fully informed about the plan for Korea of other denominations? 5) The influence of Rijutei's appeal to the American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