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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대동철학 제73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289 - 305 (1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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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를 운운하면서 그의 글씨를 멋지고 날래다고 평가한다면 옳은 일인가? 그의 글씨는 아름다운가? 과연 그의 글씨는 ‘천하의 명필(名筆)’인가? 그리고 명필의 표준은 무엇인가? “추사체는 추하다.” 추사체의 형태나 구조를 놓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어법상 맞지 않는다. 추사체는 예쁘지는 결코 않을뿐더러 오히려 기괴하거나 괴상하다. 그렇다면 추사체는 ‘미’(美)의 영역과는 반대편에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는데, 오늘날은 어찌하여 추사체가 천하의 명필로 인정되게 된 것인가? 그것은 추사의 이념 때문이다. 여기에서 김정희의 사상적 역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를 평가할 때,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라는 칭호가 따라붙는데, 왜 이러한 이야기가 한꺼번에 거론되는지 알아야 한다. 사실 그 셋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해의 관건은 바로 ‘금석’(金石)이다. 김정희가 금석학을 만나게 된 동기는 역사적으로 분명하다. 조선이 한참 북학열(北學熱)에 달아올랐을 때 이야기다. 1809년(순조 9) 24세 때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면서,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이 동지겸사은사부사(冬至兼謝恩使副使)의 자격으로 북경으로 가게 되었을 때, 아버지를 모시고 가는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직분으로 따라가게 된다. 이 때 김정희는 47세의 완원(阮元: 1764-1849)과 78세의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을 찾아 사제의(師弟義)를 맺고, 조선으로 와서도 옹방강과 편지로 연경지도(硏經指導)를 받는다. 1815년(순조 15) 30세 때는 37세의 섭지선(葉志詵: 1779-1863)과 서신으로 교유하게 된다. 1817년(순조 17) 32세의 김정희는 마침내 경주에 가서 <무장사비>를 찾고, <북한산비>를 다시 찾아 비자(碑字)를 심정(審定)한다. ‘종이에서 돌로 가자.’ 바로 이것이 당시의 이론가였던 완원의 「북비남첩론」과 「남북서파론」의 요지이다. 김정희는 사상적으로 완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진당(晉唐)의 고법(古法)’이 육조풍(六朝風)으로 바뀌는 혁명적인 개혁이었다. 중요한 것은 김정희의 정신이지 형식이 아니다. 현대의 우리에게 한나라나 북위가 생명력 있게 다가오긴 힘들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찾아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만일 김정희를 만나 그의 껍데기만 배우고 그의 알맹이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에게도 누가 되는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김정희의 이념과 정신을 말하는 것이 그의 서체를 말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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