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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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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南冥學硏究 南冥學硏究 제50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95 - 139 (4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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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 중기 문신인 姜澂(1466∼1536)의 관료생활에 대한 연구이다. 강징은 연산군과 중종을 거치면서 거의 평생을 관각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관료로서 강직하고 올곧은 길을 걸었던 인물이지만 한 번도 역사 속에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228번이나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특히 연산군의 즉위와 함께 관직에 출사하여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퇴위될 때까지 최 측근에서 성리학적 도덕정치의 이념으로서 연산군을 보필하며 경연관으로서 연산군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관료였다. 그는 언로를 열며 이단을 막고 경연을 펼친 현저한 공이 있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나약한 왕권을 흔들고 정권을 장악하려든 신진사림파와 훈구파들의 세력다툼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중종은 강징을 형조참판으로 삼고 이 난국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징은 이들의 표적이 되어 온갖 모욕과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중종은 그때마다 강징을 옹호했고 나라의 중대사를 강징과 의논했다. 중종은 강징을 예조참판으로 삼고 국정을 펴 나가면서 신진사림과 훈구파의 끈질긴 정권장악의도를 막았다. 강징은 중종을 측근에서 보필하며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동시에 중종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가하였다. 그는 특히 ‘敬’을 강조하여 성리학적 도덕정치의 이념을 실천하며, 왕도를 펼치고 의로운 길을 열어갔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기묘사화가 발생하며 조광조 일파의 급진적 개혁의도가 중지되었다. 강징은 두 번이나 사신의 임무를 띠고 중국을 다녀왔으며 외교에 있어서도 공이 있었다. 특히 명나라 세종황제의 등극에 성절사로 파견되어 서예로서 명성을 떨쳤고 황제가 국자감을 알현하는 것을 참관하는 영예를 안고 돌아왔다. 호음 정사룡은 그의 <신도비명>에서 그의 일대기를 약술하면서 관각 속의 군자로서 표현했고, 청백리로 묘사했으며, 충신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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