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史叢(사총) 제84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 - 29 (29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1945년 분단 이후 한국사학계의 지방사 연구는 대개 남한 지역 위주로 진행되었다. 이 글은 그동안 소홀히 취급되었던 북한 지역의 인구, 가족, 지리, 경제적 특성의 일단을 정리하려는 목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이를 위해 19세기 말 함경남도 순천군의 鳳峀面, 龍浦面, 院下面에 거주하던 호구를 정리한 호적표에 주목하였다. 이 호적표는 1897년에 작성된 것이었는데, 20세기 초부터 급격한 행정구역 개편이 수차례 진행되었고 자연지명 또한 대거 바뀌어 대상 지역의 정확한 위치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19세기말 호적이 지니는 호구의 누락 현상까지 겹쳐 19세기 순천군의 인구 규모를 추산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1897년 당시 순천군의 가족 구성, 산업과 직업, 가옥의 규모 등은 밝힐 수 있었다. 19세기말 순천군의 가족은 母系나 妻系가 철저히 배제된 父系 위주로 구성되었고, 직계가 아닌 傍系 가족도 4%에 불과했다. 순천군에서 보이는 ‘父系直系’ 위주의 가족 구성 원리는 당시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는 일반적인 경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고 지방에 국한한다면 순천군 주민들의 경제적 수준은 높은 수준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추정은 경제력과 비례하는 1인당 가옥 규모를 통해 가능했다. 순천군 주민 직업의 특징으로는 상업 종사자가 11.8%에 달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들 상인들은 농업 종사자보다 평균적으로 1.19칸 넓은 가옥을 소유하고 있었다. 순천군에 상인이 많았던 것은 그곳이 교통의 요지이자 물자의 집산지였기 때문이었다. 상업 인구가 많고 교통이 발달한 곳이어서인지, 당시 한반도에 넓게 퍼져 있었던 동족촌락은 1곳에 불과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28)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