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70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85 - 104 (20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글은 중화민국 시기 주조선(駐朝鮮) 청진영사관 신설 과정과 그 이후 중·일 간의 교섭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검토하였다. 여기서 주목하는 청진영사관은 식민지 조선북부 함경북도를 관할 구역으로 1930년 6월설립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청진영사관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양국 간 영사관 승인 문제를 둘러싸고 오랜 기간 협상이 계속되었다. 이 글에서 밝혀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주조선 영사관 조직 변화의 관점에서, 청진영사관 신설은 인천영사관 철폐와 연관되었다. 중화민국정부는 인천영사관을 철폐하고 청진에 영사관을 신설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군의 의견에 따라원칙적으로는 청진영사관 신설을 군사상의 이유로 반대하면서도 요녕성(遼寧省) 모아산(帽兒山, 곧 臨江)과 조남(洮南), 하남성(河南省) 정주(鄭州) 3곳 영사관 개관을 교환조건으로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중화민국정부의 재외 영사관 설치 과정에서, 청진영사관 설립은 대만영사관 개관과 관련되었다. 북양정부(北洋政府)는 대만영사관 설치를 위해 일본과 교섭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남경국민정부(南京國民 政府)는 앞서 언급한 3곳 영사관 설치를 주장하는 일본에 대응하여 대만의 대북(臺北)과 대남(臺南) 그리고 조선의 청진 개관을 주장하였다. 결국 1930년 말 대만영사관 문제는 중국이 정주의 일본영사관 개관을 승인하면서 해결되었지만, 청진영사관 문제는 마무리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만주국의 성립은 청진영사관 문제를 둘러싼 중일 간의 교섭에 영향을 미쳤다. 모아산, 조남이만주국 경내로 포함되면서 일본영사관 신설은 불필요해졌다. 일본은 또 다른 교환조건으로 강소성 해주(海州) 의 영사관 개관을 요구하면서 청진 개관 승인을 미루었다. 또한 만주국이 청진에 영사관을 개설하려는 요청을불허하였는데, 그 요청을 승인하면 제3국의 영사관 개설을 거부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1935년 이후 중일관계는 점차 회복되고 있었지만 일본은 여전히 조선군의 반대를 이유로 영사관 승인을 거부하였다. 6년 여 끌어온 청진 현안은 중일 양국의 외교 교섭이 아니라 조선군의 무력으로 해결되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