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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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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이탈리아어문학회 이탈리아어문학 이탈리아어문학 제46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 - 19 (1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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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테와 정치를 연결할 때, 피렌체에서 쫓겨난 이유와 그 이후의 오랜 망명 생활 등을 언급한다. ‘꽃의 도시’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단테의 텅 빈 무덤과 동북부 해안의 라벤나에 있는 실제 무덤을 비교하며 정쟁의 회오리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단테 자신의 정치적 이력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단테의 망명 생활에 대한 여러 추정설이 있지만, 확실한 신빙성이 없다. 그럼에도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을 전전하고 다른 나라 예를 들어 프랑스와 영국 등을 돌아다녔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단테는 그가 어느 곳에 있던지 어디로 또 가야할지 등에 대해서 늘 고민하고 틈만 나면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고자 애썼다. 그의 간절함은 컸지만, 늘 빗나가기만 했고, 그나마 1315년 피렌체가 제안한 유일한 사면조차도 배상금 지불과 공개적인 참회를 동반한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조건이어서 정치적인 자존심을 꺾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실제로 단테가 피렌체로 돌아가고픈 간절함이 최대치에 이르렀던 때는 이보다 앞섰던 1309년이었다. 이때가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하인리히 7세가 등극했을 때이다. 단테는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의 정치적 혼란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정치적 꿈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인물이라고 믿었다. 1312년 마침내 하인리히 7세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들어왔으나 교황의 개입으로 피렌체는 열외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1313년 황제는 나폴리를 향해서 진군하던 중에 말라리아에 걸려 급사하는 불운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그에게 걸었던 모든 꿈과 희망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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