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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31권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439 - 471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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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전후 독일 마인츠에 <유럽사 연구소>가 설립되는 과정과 주도적 인물들에 대한 조명을 통해 당시 유럽 지식인들의 유럽인식을 살피고자 한다. 이 시기 독일 역사학계는 “파국”을 경험한 후 주류 학자들에 맞서 민족사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독일사에 대한 수정적 이해를 요구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독일 서남부 출신의 기독교 역사가들로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사 이해를 비판하고, 독일사를 연방주의적 관점에서 그리고 유럽사적 맥락에서 읽어내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연구소 초기 역사의 주역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중에서 프리츠 케른은 연구소 설립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이였다. 특히 그의 보편사적 구상은 민족사적 지향을 견지해 온 독일학계에서는 흔치 않은 것이었다. 물론 그는 연구소 설립 직전 사망함으로써 스스로 기획한 프로젝트를 실현시킬 수는 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기획을 통해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유럽의 화해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유럽사 연구와 그를 촉진할 연구소 설립을 통해 유럽공동체 형성에 기여하리라고 보았으며,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유럽적 정체성에 대한 기여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독일 역사학자들의 지향과 함께 점령군으로 프랑스의 문화정책이 연구소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명백하다. 전후 프랑스 점령지에서는 슈미틀랭의 주도 하에 일찍부터 독일인의 민주주의적 재교육을 지향한 문화정책이 추구되었다. 40년대 후반 냉전이 본격화되고 서독을 포함한 서유럽 연합 건설을 위한 노력이 현실화되면서 프랑스의 문화정책은 민족적 적대를 극복하고 특히 독일과 프랑스가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이때 프랑스 문화정책 담당자들은 역사교육의 유용함을 인지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독일 교과서 수정 그리고 나아가 유럽사적 차원에서의 역사연구와 교육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독일 역사가들의 연구소 설립 시도를 적극 지원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1950년 설립된 유럽사연구소는 처음부터 유럽적 정체성에 대한 연구를 지향하였다. 사실 이 글이 다룬 연구소 설립기는 전후 질서의 형성기로서 유럽건설에 대한 지향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유럽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대체로 유럽의 동질성에 대한 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때로 그것은 가톨릭이란 초민족적 동질성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유럽적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또 유럽적 정체성을 거론하는 경우 그 동질성만큼이나 다원적 성격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후 유럽 논의는 이런 정체성의 다원적 성격에 주목하기보다는 지나치게 단순논리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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