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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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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33권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15 - 149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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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地理志에 전하는 安東都護府 관련 ‘目錄’은 일반적으로 고구려 멸망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목록’ 중 未降城에 포함된 新城은 실제로 667년 무렵 당군에 함락되었으므로 고구려 멸망 이후의 정황이라 보기 힘들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해당 ‘목록’에는 ‘未降城·已降城·逃城·打得城’의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성들의 항복 여부가 최대 관심사였다. 또한 주요 大城의 명칭에 州 표기가 부여되어 대략이나마 고구려 지방 지배 조직을 재편하였던 정황이 감지된다. 그렇다면 ‘목록’은 李勣과 淵男生이 안동도호부 체제를 구성하면서 작성한 일차 현황 보고서로 이해함이 옳겠다. 이적은 668년 10월에 寶臧王과 淵男建 등을 사로잡아 당으로 돌아갔지만 고구려 전체를 안정적으로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고구려 지배층 상당수는 당에 귀순하였지만 반대로 안동도호부 체제에 이반하였던 세력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당은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대규모 徙民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反唐 항쟁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劍牟岑과 安勝의 활동은 물론 扶餘 지역의 항쟁, 高定問, 安市城 및 高延武 사례를 묶어보면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전쟁은 故地 전역에서 왕성하게 전개되었다고 여겨진다. 다만 이들의 활동이 조직화 혹은 일정한 연대 움직임을 보이지 못한 채 분산적이고 고립된 성격에 머물렀던 점은 뚜렷한 한계라 여겨진다. 이는 연남생 형제의 내분 과정에서 집권층 상당수가 離合集散하였고,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이 당에 체류하면서 부흥전쟁의 원동력이 크게 약화하였던 데에도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한다. 결국 상징적 구심점을 찾지 못한 고구려 유민들은 각각의 입장에 따라 분립 행보를 고수하였고, 압록강 이북에 세력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던 검모잠·안승 역시 한성 일대에 한정된 復國 그리고 신라 附庸을 현실적 방안으로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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