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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수진 (국민대학교)
저널정보
역사실학회 역사와실학 歷史와實學 第72輯
발행연도
2020.8
수록면
5 - 37 (33page)
DOI
10.31335/HPTS.2020.08.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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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9년 안동도호 설인귀와 유인궤가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평양 일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은 약화되었고, 이때 검모잠의 부흥운동 세력은 평양을 탈환했던 것으로 보인다. 검모잠의 부흥운동 세력이 일시적이었지만 안동도호부를 점령하고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옹립한 것이다. 평양에서 고구려왕의 즉위 소식에 충격을 받은 당은 고간과 이근행 등을 보내 무력 진압을 단행하였고 검모잠 세력은 남하하였다.
검모잠은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옹립하고 평양성에서 한성까지 시종일관 부흥운동을 주도하였고, 수도 평양과 별도 한성에서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을 옹립하여 왕실의 복고(復古)와 고구려의 복국(復國)을 시도한 정통론자였다. 한성은 별도(別都)의 공간적 위상을 갖고 있는 곳으로 평양을 제외하면 고구려국을 재현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한성은 고구려 남부 지역의 중심지로서 부흥운동을 전개하기에 적절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검모잠은 이러한 한성의 기반을 활용하여 부흥운동을 전개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평양으로의 북진을 꾀했을 것이다.
검모잠이 신라에 안승의 고구려왕 즉위 소식을 전하면서 한성에서의 부흥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신라가 금마저로의 이주를 제안하면서 한성의 고구려국은 분열하였다. 검모잠은 죽임을 당하고 안승은 신라로 들어간 것이다. 검모잠은 한성을 벗어나서 부흥운동을 하는 것에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승 세력이 신라로 들어가면서 한성의 고구려국의 전력은 약화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군과의 충돌도 대비해야 했고, 신라와 금마저의 고구려국과의 충돌도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671년과 672년 왜에 사절을 보내 불안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의 고구려국은 금마저의 고구려국과는 독자 노선을 견지하며 부흥운동을 전개해나갔고 673년 연산도총관 이근행에게 격파당하면서 ‘평양이잔(平壤痍殘)’이 신라로 들어갔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검모잠의 평양 탈환과 안승 옹립
Ⅲ. 한성에서의 부흥운동 노선의 분화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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