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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재도 (한성백제박물관)
저널정보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동북아역사논총 47호
발행연도
2015.3
수록면
139 - 169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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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과 검모잠 등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에 관한 사료는 비교적 풍부한 편이나 사건의 시기가 불분명하고 사료 간에 내용이 상충하여 연구자마다 견해를 달리한다. 이 글에서는 중국 사료들 간의 내용 비교, 『신당서』 동이열전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비교, 고구려본기의 구조 분석, 『일본서기』에 보이는 고려사를 통해 한성의 고구려국의 성립과 나당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규명하였다.
670년 6월 이후 안승이 한성 고구려국의 왕으로 즉위하여 5부와 관등을 정비하였고, 평양 이남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671년 9월 신라군과 연합하여 당군을 침입을 물리쳤고 이듬해인 672년부터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다. 양측은 석문 전투 이후 4개월간 백수산 전선을 유지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봉산 고당성의 지명이 이때에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러한 대치과정 중 672년 8월 이후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내분과 기근 등으로 673년 윤5월에는 호로하까지 밀리게 된다. 안승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왜에 사신을 파견하려고 하지만 당군이 황해를 봉쇄한 까닭에 신라 송사의 도움으로 왜에 사신을 파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로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모두 신라로 내투하게 되었다. 하지만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닸다는 기존의 이해와 달리 안승은 마지막까지 고구려인들과 함께하였고, 이러한 신뢰가 있었기에 신라 내투 이후에도 보덕국에서 안승을 중심으로 결속할 수 있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사료의 검토
Ⅲ. 한성의 고구려국 성립과 대당전쟁
Ⅳ. 한성의 고구려국 소멸과 안승의 내투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 초록]
[ABSTRACT]

참고문헌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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