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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成制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98호
발행연도
2020.6
수록면
175 - 205 (31page)
DOI
10.37331/JKAH.2020.06.98.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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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연구에서 비문의 ‘5月中’ 이하의 기록은 양국 군주의 會盟에 관한 내용이라 보아 왔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회동의 구체적 장면이나 논의 내용은 보이질 않는다. 대신 이 회합에 후속한 부대행사였을 衣服 賜與의 장면들만이 자세히 기재되고 있다.
의복 사여의 행사가 특기되었던 것은 그 대상자에 12월 23일 于伐城에 모였던 양국 관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에 있다고 보인다. 新羅土內幢主를 비롯한 양국 관계자들은 우벌성에 모여 300명의 신라인을 募人하였다. 당주의 주둔지를 위한 이같은 力役徵發은 그간 당주가 일방적으로 해오던 관행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신라 측의 협조 아래 시행된다는 점에서 특기해야 할 의미를 가졌다. 그리고 그 의미하는 바로 보아, 이같은 관행은 양국이 대면하고 있던 공간 어디에서나 벌어지고 있었던 문제였다고 여겨진다.
같은 맥락에서 何瑟羅城主의 高句麗 邊將 살해는 이러한 문제에서 빚어진 사건이었고, 고구려의 군사행동을 불러왔던 것으로 보인다. 訥祗王은 ‘卑辭謝之’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에서 449년 5월 신라 寐錦이 고구려 영내인 충주까지 와야 하였고, 고구려왕이 주재한 의복 사여 행사에 참여해야 했던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하슬라성주의 고구려 변장 살해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전하는 史書의 기록은 양국 군주가 충주에서 만나게 되었던 배경과 경위였던 것이다.
그러던 고구려 우위의 양국 관계는 좌면에 古鄒加 등의 군사행동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얼마 지나지 않아 파탄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군사적 우위가 절대적이지 못하며, 신라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충주 지역은 직접적으로 관계되었다. 고구려로 보아서 신라에 대한 대응과 함께 당장 시급한 일은 현지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것이었다. 비문에 양국의 차등적 관계를 거듭 부각하고, 모인 활동이 5월중의 합의에 따른 것임을 기술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양국의 우열관계는 분명하며 현재의 상황에 이른 것은 신라가 합의를 저버린 때문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비는 일종의 布告文에 해당한다. 건립 시기는 눌지왕의 ‘비사사지’로 보아 450년 7월 이후가 될 것이다. 입비의 목적과 전달 내용은 後面과 右面에 기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거기에는 불안해 하는 현지민들을 달래기 위한 按撫의 내용과 함께, 남방 경영이 중단없이 진행될 것임을 천명하는 기술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돌에 刊刻되었다는 점에서 미래까지도 포고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목차

국문초록
I. 머리말
II. 비의 석독과 주요 내용
III. 高句麗王의 衣服賜與와 대상자
IV. 新羅土內 幢主의 募人 활동과 그 의미
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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