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동북아역사논총 제68호
발행연도
2020.6
수록면
153 - 238 (86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논문은 ‘고리[高麗] 사신이 사마르칸드에 간 적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두 번째 반론이다. 고리[高麗]가 사마르칸드에 사절을 파견할 수 없다는 주장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① 중앙아시아와 몽골초원이 당의 지배 아래 있어 사행(使行)이 불가능하였다.
② 고리[高麗]에서 사절을 파견하지 않았다. - 설연타(薛延陀)와의 연합에 대한 비판
③ 소그드인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갈 수 없었다.
1. 위의 주장에 대한 반론과 서돌궐과의 연합 시도론 제기
지배선은 바르후만이 강거도독으로 임명되기 이전, 곧 당의 영향력이 사마르칸드에 미치지 못했던 652년에 고리[高麗]가 당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당나라에 사절을 파견했는데, 바로 그해 정월에 사마르칸드에도 사신을 보냈다고 보았다. 한편 이재성은 660년 8월부터 철륵(鐵勒) 여러 부에서 당나라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은 663년 정월까지 계속되어 2년 5개월간 당의 세력권을 벗어난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이 기간에 연개소문이 철륵과 연대를 꾀하였을 것이라고 보았다.
2. 고리[高麗]와 설연타(薛延陀)의 연합 시도에 대한 재평가
사행부정론자들은 설연타와의 연합은 실제 성사되지도 않고 이득도 없었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다시 연합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대 견해를 보였다. 이 문제를 깊이 있게 검토하여 645년 고리[高麗]와 설연타의 연합은 크게 성공하였다는 것을 밝혔고,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 설연타의 북서전선 침입 때문이라는 것을 밝혔다.
3. 650년대 고리[高麗]의 사마르칸드 사행(使行) 가능성 검토
일반적으로 고리[高麗]와 돌궐의 관계는 서로 적대관계로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 많았다. 돌궐이 고리[高麗]를 침략하고 당이 고리[高麗]를 칠 때 선봉에 선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궐과 고리[高麗] 관계를 동태적으로 분석해보면 시대나 정황에 따라 늘 가변적이고, 필요에 따라 서로 연합을 시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고리[高麗]는 스스로 초원길을 왕래할 경험과 인적 자원 보유
끝으로 소그드인의 안내가 없으면 고리[高麗] 사절이 초원길을 왕래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사료 검토를 통해 고리[高麗]와 유연은 서로 이와 잇몸처럼 가까이 왕래했고, 함께 연합하여 지두우를 경략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돌궐에게 망한 유연의 일부가 집단으로 고리[高麗]로 이주했다는 기록을 통해, 고리[高麗]에 유연의 집단거주지가 있었다는 것도 밝혔다.
유연은 5~7세기 동쪽 고리[高麗]에서 서쪽 알타이를 넘어 중가리아(準噶爾, Dzungaria, Zhungaria)까지 자유롭게 넘나들었기 때문에 초원길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고리[高麗]는 자체의 힘으로 초원길을 다닐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목차

Ⅰ. 문제의 제기
Ⅱ. 사행 부정론의 논거와 선행 연구 검토
Ⅲ. 650년대 고리[高麗]의 사마르칸드 사행[使行] 가능성 검토
Ⅳ. 고리[高麗]와 서돌궐(西突厥)의 연합 가능성 검토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