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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동원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120집
발행연도
2021.9
수록면
225 - 261 (37page)
DOI
10.52271/PKHS.2021.09.1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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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1550-1551년 트란실바니아의 내란 국면에 대한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의 대응 방식을 평가하는 데 있다. 대공은 ‘다뉴브 왕국’의 건설자였다. 성공의 관건은 헝가리 정복 여부였다.
1542년 부다 탈환 실패 후 페르디난트 1세의 오스만에 대한 정책 기조는 방어적인 대응이었다. 외교로써 오스만과 평화관계를 유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헝가리 전체가 아닌 트란실바니아에 대한 권리만이라도 확보하고자 했다.
1547년 휴전협정 체결은 오스만에 대한 오스트리아 외교의 전환점이었다. 빈당국이 이스탄불에 설치한 상주대사를 통해 수시로 오스만과 협상할 수 있었고 국제정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디난트 1세는 초대 상주대사인 말베지가 보내온 정보를 바탕으로 틈틈이 트란실바니아를 합병할 기회를 엿보았다.
외교적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외교적 협상만으로는 술탄에게서 트란실바니아를 넘겨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551년에 이자벨라와 마르티누치 간에 벌어진 트란실바니아 내전은 대공이 트란실바니아를 무력으로 접수할 절호의 기회였다. 마침내 그는 말베지가 보낸 정보에 입각하여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대공은 동맹자였던 마르티누치와 대립하면서 트란실바니아 내 권력 기반을 잃었고 오스만 군대의 침공을 받고는 트란실바니아에 대한 주도권을 술탄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비록 1551년 트란실바니아 합병 노력은 실패로 끝났으나 대공은 그 노력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그러한 대공의 노력은 1918년까지 존속하는 중부유럽왕국의 토대가 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쟁점의 변화: 부다에서 트란실바니아로
Ⅲ. 1551년 트란실바니아의 위기와 페르디난트 1세의 대응
Ⅳ. 맺음말: 1551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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