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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명환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00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91 - 127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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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구축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정보를 활용하여 3․1운동 당시 헌병․경찰조직의 구성과 배치의 특징을 살펴보고, 이들에 의한 만세운동 탄압현황을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1910년대 韓半島의 치안은 헌병과 경찰이 담당하였다. 이중 헌병이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관서수나 인원 등 조직규모면에서 헌병이 경찰보다 우세하였다. 3․1운동 당시 헌병 및 경찰 관서는 전국 각지에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었고, 末端 관서의 경우 대략 5명 가량의 인원으로 편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이 주로 주요한 도시를 관할구역으로 삼은데 비하여, 헌병은 만주와 접한 국경지역이나 북부 산간지대를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북부지역은 헌병관서가 많은데 비하여 경기 이남지역은 경찰이 더 많은 지역도 있었다. 3․1운동 당시 발생한 사건은 총 2,464건으로 집계되며, 이중 시위는 1692건이었다. 이것은 3․1운동 당시 주요한 투쟁방식은 시위였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국내에서 발생한 시위는 1593건으로 집계되는데, 경기-황해-평북-경남 등의 지역에서 많이 발생하였다. 이중 탄압양상이 발견되는 시위는 300건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시 3․1운동이 평화적으로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탄압양상이 발견되는 사건 중에는 발포행위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였다. 즉 당시 무력탄압은 대부분 발포형태였다는 것이다. 도검 및 기타 무기에 의한 탄압은 매우 적은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칼이나 몽둥이로 탄압한 사례가 많이 발견된다는 점과 배치되는 결과이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보고는 주로 발포 위주로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헌병 및 경찰 사이의 협력관계를 살펴보면, 헌병 혹은 경찰이 군대와 협력하여 조선인을 탄압한 사례가 많다. 이에 반해 헌병과 경찰이 함께 조선인을 탄압한 사례는 매우 드물게 발견된다. 이것은 당시 헌병과 경찰의 관할구역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이해된다. 실제 당시 일제의 3․1운동 탄압사례를 살펴보면 헌병과 경찰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하게 나타난다. 개성군 송도면의 사례에서는 헌병이 경찰관할구역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점이 확인된다. 이에 비해 영덕군 영해면의 사례에서는 경찰이 조선인 진압에 실패했을 때 헌병이 투입되고 군대가 지원에 나서는 과정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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