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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경주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저널정보
호남고고학회 호남고고학보 호남고고학보 제58권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26 - 51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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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 이후 삼한과의 교섭을 통해 성장한 주호가 3세기쯤 상위계층이 등장하면서 대외교류의 주체인 탐라정치체로 전환되었다. 용담동 철기부장묘는 바로 한반도 남부지역 제소국과의 교역체계에 참여했던 상위계층의존재를 시사하는 것이다. 탐라는 3세기 후반까지 서남해안의 신미제국을 거점으로 연결되는 교역루트를 통해 마한의 선진문물과 함께 변진한 지역의 철기를 수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3~5세기대 탐라의 거점취락에서 출토되는 마한계 외래토기는당시 영산강유역을 비롯한 서남해안 일대의 정치체와 상호 교류의 증거이다. 한편 영산강유역의 마한세력은 5세기 후반 동성왕의 무진주 친정으로 축소되고 6세기 전반경 백제가 섬진강유역까지 진출하면서 직접지배 영역으로 포함된다. 이처럼 교역의 거점이었던 서남해안지역 마한세력의 소멸과 백제의 영역확장은 탐라의 교역체계에 큰 위협이 되었고 이로 인해 무령왕 8년(508) 백제와 첫 통교를 하게 된다. 이후탐라는 무령왕~위덕왕대 신속관계를 맺게 되는데 외교권을 위임한 채 자치권을 보장받는 간접지배 방식을 택했던것으로 해석된다.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에 복속된 후에도 여전히 동일한 지배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7세기 후반 신라의 탐라 경략으로 직접지배 방식의 복속관계로 전환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백제 신속 기간과 멸망 후 신라의 탐라 재경략 이전까지 종래의 곽지리식토기 전통이 잔존하고 있지만 백제와 통일신라 양식의 고고학적 물질문화가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3세기대 등장한 탐라는 서남해안 지역의 정치세력을 기반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의 다양한 정치체와 교역체계를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루트는 백제의 영역확장과 신속 그리고 신라의 복속과 경략 과정에서 축소되고 와해되었지만 8세기 이전까지 國체제의 자치권을 인정받으면서 탐라라는 국명으로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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