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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진성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미술사와 시각문화 미술사와 시각문화 제17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208 - 229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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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의 한 사람인 예찬(倪瓚, 1301-1374)은 중국 문인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식되어 왔다. 전경에 높이 솟은 나무들, 텅 빈 정자, 적막감이 흐르는 강 등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그림들은 원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살았던 재야 지식인의 내면 풍경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그림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이른바 ‘원대 회화 혁명(the Yuan revolution in painting)’, 즉 문인화(文人畵)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예찬은 원말사대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로 여겨졌다. ‘자아 표현(self-expression)’이 핵심인 문인화의 본질을 대변했던 인물이 예찬이다. 예찬의 그림에 보이는 절대적 적막감과 간결하고 정제된 화면 구성은 그의 내면세계를 표현해 주는 시각적 특징으로 해석되어 왔다. 따라서 예찬의 그림은 늘 그의 인생을 보여 주는 ‘자전(自傳)적 회화’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을 분석해 보면 과연 그의 그림들을 자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 작품들은 모두 예찬 본인을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다. 이 그림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린 작품들이다. 현전하는 예찬의 그림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하문언(夏文彦, 14세기 중·후반에 활동)에 따르면 예찬은 만년에 그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여 소략한 그림들을 다수 그려 주었다고 한다. 특히 이와 같이 대충 그려준 ‘응수화(應酬畵)’는 마치 예찬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린 것으로 여겨질 만큼 성의가 없었다고 한다. 예찬은 고고(孤高)한 성격으로 세상과 등을 지고 산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그림 요구에 응하여 다수의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그가 그린 그림들은 거의 대부분 응수화였다. 응수화는 ‘자아 표현’과 상관없는 그림들이었다. 즉 예찬의 그림에는 본인 자신에 관한 것이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예찬의 그림은 결코 자전(自傳)적인 그림이 아니다. 후대에 예찬이 ‘고결(高潔)’한 인물로 추앙받게 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의 결벽증조차 탈속(脫俗)적인 특징으로 이해되었다. 아울러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에 예찬 화풍으로 그려진 그림이 상인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으며 ‘아속(雅俗)’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 것은 흥미롭다. 예찬 그림의 대부분은 그의 자아를 보여 주는 그림이 아니라 그림 요청에 따라 그린 응수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대에 예찬 그림은 ‘일품(逸品)’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후대의 인식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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