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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재환 (중앙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105호
발행연도
2022.3
수록면
205 - 242 (38page)
DOI
10.37331/JKAH.2022.3.10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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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병합된 이후 가야계 인물들 사이의 위상 차이는 컸다. 그러한 위상차의 출발점에는 가야諸國 중 어느 國 출신이었는가, 해당 國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나, 신라인이 되는 과정이 어떠했나 등에서의 차이가 작용하였다. 그러나 그 차이를 더 현격히 벌어지게 만든 것은 신라인이 된 후의 활동이었다.
금관국왕 仇亥와 그 아들들은 앞장서 투항한 금관국의 왕족으로서 왕경 육부인의 ‘骨’로 편입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戰功과 정치적 활동을 통해 최상급 관등·관직을 획득하였으며, 그에 기반하여 왕실 인물들과의 혼인 관계를 점점 더 가까이 만들어 나갔다. 결국 신라 왕실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같은 집안’이 된 그들은 신라왕실 및 그들과 밀접한 관계의 일부 가계들과 더불어 金氏를 稱姓하면서 ‘신라의 김씨’가 되었다.
금관국계 왕족이라고 해서 동일한 대우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김해에 남게 된 금관국 왕족과 그 후손들은 성씨를 가지는 왕경인이 될 수 없었다. 지방 유력자로서 對日本 교류에 관여하면서 성씨 대신 기존 국가와의 연관성을 내세워 ‘加良’을 冠稱한 사례가 확인된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조금 늦게나마 왕경인으로 편입될 기회를 얻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김씨를 칭성하고 있던 김유신 가문과의 계보적 연관성을 내세워 성씨를 획득할 수 있었지만, 김씨를 그대로 칭하지는 못하고 ‘新金’氏를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김해 지역에 남아있던 이들이 성씨를 칭할 수 있게 된 것은 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약해진 下代末이 되어서부터였다. 그들은 더 이상 ‘신라의 김씨’를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이 때 나타난 ‘김씨’는 신라의 (구)김씨도 신김씨도 아닌, ‘가야계 김해 김씨’였다고 할 수 있다.

목차

국문 초록
I. 머리말
II. 우륵과 강수, 그리고 도설지
III. ‘신라인’으로서의 仇亥와 그 자손
IV. 김유신 가문과 신라의 김씨
V. 新金氏와 김해 거주 금관국계 인물들의 성씨 문제
VI.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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