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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건우 (국립청주박물관)
저널정보
국립중앙박물관 미술자료 미술자료 제100호
발행연도
2021.12
수록면
22 - 49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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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願寺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북쪽에 위치한 사찰로, 경내에는 나말여초에 조성된 문화재가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충청남도의 고적 조사를 계획했고, 1916년(대정 5) 보원사지에 가서 현지 조사를 진행했다. 현지 조사 과정에서 小屋에 안치된 철조여래좌상(무릎너비 7척, 두께 5척 5촌)을 확인했고, 이듬해에 경복궁으로 해당 철조여래좌상을 이운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보원사지에 2m가 넘는 대형 철조여래좌상 1구만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철조여래좌상은 法印國師 坦文(900~975)이 955년에 조성하였을 것이다. 탄문은 광주 고봉의 유력가문 출신으로 태조의 보살핌 속에 화엄종의 중심인물로 성장했고, 연이어 惠宗(재위기간943~945)과 定宗(재위 945~949)대에도 왕실의 불교행사를 주관했다. 이후 탄문은 大穆王后 皇甫氏(?~?)의 후원을 받은 均如(923~973)의 등장으로 개경에서 떨어진 보원사로 이주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충주 유씨의 후원을 받아 지지 세력의 결속을 다지고 한편으로는 光宗(재위 949~975)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대형의 철조여래좌상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탄문의 비문에 나오는 ‘鑄金像之三尊’도 보원사에서 철조여래좌상이 주조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철조여래좌상의 原 봉안처는 보원사지 내 ‘건물지3’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현재의 금당지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건물지로 드러났기 때문에, 철조여래좌상은 조성 당시 다른 장소에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건물지3은 다른 건물지에 비해 고려시대 기와와 자기의 출토 빈도가 높고, 무엇보다도 정방형에 가까운 불단 유구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철조여래좌상은 조성 당시 고려시대 전각인 건물지3에 봉안되었다가 조선시대 중창불사를 통해 지금의 금당지로 이운되었을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조선총독부박물관과 보원사 철조여래좌상
Ⅲ. 보원사 철조여래좌상의 조성시기와 조성배경
Ⅳ. 보원사 철조여래좌상의 原 봉안처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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