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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희연 (국립중앙박물관)
저널정보
한국미술사교육학회 미술사학 美術史學 第48號
발행연도
2024.8
수록면
207 - 234 (28page)
DOI
10.14769/jkaahe.2024.08.48.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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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통일 신라 3대 금동불로 다뤄지는 중요한 불상이다. 불상은 1902년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에 위치한 백률사에서 처음 발견되어 1930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옮겨진 뒤 오늘날까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논문은 <백률사 상>의 양식을 분석해 제작 시기를 추측하고 발원 주체와 제작 배경, 의미를 밝히는 데 목적을 뒀다.
불상이 발견된 백률사는 이차돈 순교로 창건된 자추사와 동일 사찰로 여겨지며, 불상이 백률사에 안치된 신앙적 의미를 중요시했다. 본 논문은 일제 강점기 때 기록과 고대 문헌을 살펴보았지만 백률사와 자추사가 동일 사찰이며 불상이 처음부터 백률사에 안치됐다는 명확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논문은 <백률사 상>을 백률사나 이차돈 순교와 관련지어 논하지 않고 불상 자체에 초점을 두고 진행했다. 불상과 백률사, 자추사, 이차돈 순교에 대해서는 추후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8-9세기 신라 중앙 양식을 반영한 불상과 <백률사 상>을 비교해 제작 시기를 9세기 중엽으로 추정했다. 불신 비례를 비롯한 얼굴 양감, 귀 등 얼굴 표현과 대의 표현이 9세기 불상과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형 금동불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청동, 금, 밀랍 같은 값비싼 재료를 구하고 숙련된 장인을 동원할 수 있어야 했다. 9세기에 접어들면 철불이 등장하는데, 철불과 금동불 주조법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따라서 철불이 등장하는 9세기에 대형 금동불이 제작될만한 기술적 요건이 갖춰졌다고 봤다.
<백률사 상>이 조성된 시기를 9세기 중엽 경문왕과 헌강왕대로 봤다. 신라 중대와 달리 신라 하대는 왕권 약화와 원성왕계 안에서 치열한 왕위 다툼 그리고 왕에 도전하는 지방세력의 반란으로 정치적·사회적으로 불안한 시기였다. 이 혼란은 9세기 중엽 경문왕대 이르러서야 수습된다. 경문왕과 아들 헌강왕은 왕실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쓰며 신라 하대 안정기를 이룬다. 두 왕이 재위했던 시기는 비로자나불상을 비롯해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불교 조각이 가장 많이 조성된 시기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안정된 왕권 하에서 대형 금동불이 조성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9세기 초부터 끊이지 않는 가뭄, 홍수와 같은 천변재이와 역병은 9세기 후반까지 신라 백성의 생활을 궁핍하게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왕실은 약사상을 제작해 재난을 물리치고 극복할 것을 기원했을 것이고, 이는 왕이 민심을 수습하여 강력한 왕권을 드러내는 방법이었을 것으로 봤다.

목차

I. 머리말
Ⅱ. 백률사와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Ⅲ.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양식과 기법으로 본 제작 시기
Ⅳ. 9세기 중엽-후반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의미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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