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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柳志福 (전주대학교)
저널정보
미술사연구회 미술사연구 미술사연구 제42호
발행연도
2022.6
수록면
41 - 77 (37page)
DOI
10.52799/JAH.2022.06.4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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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석은 오세창과 더불어 근대기 전각계의 쌍벽을 이룬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일제 강점 직전에 미술시찰위원으로서 일본과 청에 파견되었다. 청이 몰락하고 들어선 중화민국에서 20년 가까이 지내다 귀국하였고, 50대 중반의 뒤늦은 나이에 국내 미술계 활동을 시작했다.
이 연구는 김태석의 국내 활동이 가장 잘 드러나는 1930년대에 주목하였다. 그는 당시 전주 등지에서 순회전을 열며 여러 미술계 인사들과 교유하며 인장을 새겨주었다. 그 인장들을 모아 제작한 인보가 바로 《南游印譜》이다. 김태석은 전주 翰墨會의 주축이었던 김희순, 최규상, 이광열과 사제관계를 맺으며 가장 많은 인장을 새겨주었고, 광주에서 활동한 정운면과 군산에서 활동한 황용하와는 그림과 인장을 주고받으며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이밖에 서울의 윤희채와 김재인, 대구의 서동균, 목포의 허건의 작품에서 김태석의 특징이 보여 김태석의 서예와 전각의 영향이 생각보다 넓게 확산되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김태석이 전주에서 시작한 서예 전람회는 신문에 여러 차례 홍보되며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전람회는 광주를 거쳐 대구로 이어졌다. 특히 대구 전람회는 ‘서도전각전람회’라는 전시명을 타이틀로 내걸었다. 국내에서 ‘전각’이 미술품으로 등장한 최초의 전람회였다. 전각을 전면에 내건 김태석의 대구 전람회는 인장을 새기는 행위를 자잘한 재주로 여긴 전래의 소극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미술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1930년대 초 김태석의 호남 순회전
Ⅲ. 《남유인보》의 내용과 교유 인물
Ⅳ. 김태석의 서예·전각이 근대기 서단에 미친 영향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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