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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90호
발행연도
2023.2
수록면
121 - 154 (34page)
DOI
10.21490/jskh.2023.2.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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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667~668년 2년에 걸쳐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공세적인 군사 활동 과정을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관련 자료는 대부분 「신라본기」 기사인데, 기사 내용이 단편적이거나 기년 등에서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자료에 대한 사료 비판을 선행하였다. 또한 당시 신라군의 군사 활동의 목표는 평양성 공격으로, 이와 관련된 당의 요청이나 당군의 동향을 연계하여 파악하였다. 667년에 문무왕은 당 고종의 공식적인 참전 요청이 없었음에도 대규모 신라군을 이끌고 북진하였다. 이는 평양성 공격에 신라군이 배제되어 전후 처리과정에서 고구려 영토에 대한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한 의도였다. 반대로 당은 김인태와 김인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신라군을 동원하고자 했다. 양국의 속내가 서로 다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은 웅진도독 유인원으로 하여금 비열홀을 경유하여 진격하도록 했는데, 이 역시 새로 확보한 비열홀 일대를 둘러싼 신라와 당의 잠재된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문무왕은 9월에 한성에 도착하여 이적 당군의 평양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라본기에는 10월 2일에 당군이 평양성 북쪽 2백리에 도착해서 보낸 사신으로부터 평양성 공격 기일을 전달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이들 사신이 한성에 온 경로를 국내성에서 비열홀을 거쳐 한성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당시 이적의 당군은 압록강을 도강하지 못하였다고 파악하였다. 그래서 신라군은 방원령로를 통해 11월에 獐塞(수안)까지 진격하였다가 회군하였다. 668년 전쟁에서도 당은 신라군의 참전을 배제하고 유인원의 웅진도독부의 군사만으로 고구려 남부전선을 돌파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유인원은 장안으로 소환되고 유인궤가 신라군의 참전을 공식 요청하였고, 문무왕은 그동안 준비를 갖춘 대규모 원정군을 출정시켰다. 신라군의 참전으로 고구려군은 압록강 방어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평양성 전투에 승부를 걸었으며, 그 결과 당군의 압록강 전선 돌파가 가능해졌다. 신라군 선발대는 유인궤 당군과 함께 평양성으로 북진하였으며, 재령로 혹은 자비령로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신라본기에 보이는 신라군 선발대와 이적의 당군이 합류한 시점, 신라군의 본대와 당군이 만난 시점에 대해 신라본기 기록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음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평양성 공격에서도 신라군은 평양성 전 지역에서 당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음을 문무왕의 군공 포상 기사를 근거로 파악하였다. 또한 문무왕은 한성에 머무르면서 임진강 이북에 새로 확보한 영역에 대한 통제력 강화를 시도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김춘추와 당태종의 밀약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667년 신라의 군사 활동과 당의 태도
3. 668년 신라의 군사 활동과 평양성 공격
4.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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