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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현순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민족문화연구 제97호
발행연도
2022.11
수록면
153 - 186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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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개국 초에 고려의 제술업을 개편하여 제술과 강경을 함께 시험하는 특유의 식년문과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숙종대에 이르면 문과가 강경 위주의 명경과(明經科)와 제술 위주의 제술과(製述科)로 이원화되고, 식년문과는 명경과로 인식되며, 평가절하되었다. 이 연구는 왜 식년문과가 조선 초기의 구상과 달리 명경과로 변화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하였다. 식년문과 회시는 세 장의 성적을 합산하는 통고(通考)의 채점법을 따르지만 초장 강경을 통과해야만 중장⋅종장의 제술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초장 강경이 자격시험의 성격을 지녔다. 그런데, 중종대 이후 초장 강경 시험 통과자가 30-40명 수준으로 줄어들면서 강경 시험 통과가 곧 문과 급제로 이어졌다. 그리고, 강경성적이 특별히 우수한 경우는 제술성적과 상관없이 급제를 인정하는 관행도 나타났다. 인조대 후반부터는 16세기와 달리 강경고득점자가 늘어났다. 하지만 고득점자의 급제를 인정하는 관행이 지속되면서 식년문과 급제자의 대부분이 강경 고득점자로 채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늦어도 숙종 34년 이전에 아예 강경으로만 31-32명을 선발하고 나머지 1-2명을 제술 시험으로 선발하는 관행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식년문과는 명경과로 인식되고, 문과는 명경과와 제술과로 이원화되었다. 유생들은 명경과와 제술과 중 하나를 선택하여 시험을 준비하였는데, 명경과보다는 제술과를 선호하였다. 그리하여 식년문과의 위상은 갈수록 낮아졌고, 영조대와 정조대에는 제술생들의 강경 교육 문제가 교육 정책의 주요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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