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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은주 ((재) 한국국학진흥원)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영남학 제83호
발행연도
2022.12
수록면
91 - 128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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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낙동강 연안에 위치한 누정과 그 문학적 소통 양상을 규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강이 지닌 경계의 역할과 함께 소통의 기능을 전제하면서 낙동강 연안의 누정을 중심으로 어떤 양상의 문학적 소통이 이루어졌는지 그 실제적 모습을 탐색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 대상으로 구미 선산 지역의 매학정을 선정한 것은 지금도 존재하는 누정으로서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점을 우선 고려했다. 구체적인 논의 진행을 위해 먼저 구미 선산 지역 낙동강 연안의 누정 전반과 관련 제영시 현황을 검토했다. 조선시대 편찬된 선산 관련 지리서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본 결과 선산 지역 누정은 19세기 말까지 公廨를 포함해 총 32개로 집계되었다. 이 가운데 낙동강 연안에 위치한 누정은 모두 11개였다. 이 누정들은 오랜 시간 동안 생성과 소멸을 거듭했는데, 한결같이 명맥을 유지했던 것은 매학정을 포함해 월파정과 노자정 3곳 정도였다. 이것은 제영시 현황에 있어서도 비슷한 현상을 드러냈다. 다음으로 매학정의 건립 배경과 역사적 자취를 살펴보았다. 매학정은 1533년(중종28) 황기로가 처음 건립했다. 이후 사위이자 율곡의 동생인 玉山 李瑀(1542~1609)에게 물려주면서 이우의 자손들이 매학정을 관리 보존했다. 임진왜란을 거치고 시간도 오래 지나면서 매학정은 점점 퇴락했고 결국 무너지게 되었는데, 이우의 고손자 李東溟(1624~1692)이 1653년(효종4)에 완전하게 복구했다. 19세기 전반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는데, 1862년(철종13) 황기로의 7대손 황민술이 원래 그 자리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매학정 제영시에 대해서는 1533년부터 1866년까지 약 330년 동안 40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적지 않은 분량의 작품을 남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매학정 건립 초기의 제영시들은 창작 배경에 있어서 정자 주인 황기로와 매학정 그 자체에 연결고리가 닿아있었다. 그러나 황기로가 사위 이우에게 매학정을 물려주면서 그곳에는 율곡 이이의 동생인 이우의 자취가 깃들기 시작했다. 기사환국때 송시열의 당으로 지목되어 유배를 당할 만큼 노론계 핵심 인물로 활동했던 이동명은 매학정을 복구하면서 당대 유명 문인들에게 시와 서문을 받기 위해 광폭 행보를 보였는데, 이 때문에 17세기 중엽부터는 매학정 제영시가 서인 노론계 인물들의 작품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누정 자체를 읊은 누정 제영시는 정서적 소통의 측면이 두드러졌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데, 오랜 시간의 역사적 배경 때문에 공간 인지가 시간을 종적으로 넘나들기도 하고 횡적인 시간대를 기준으로 창작자의 공간이 지역을 넘나들기도 했다. 누정 제영의 창작 배경으로서 누정 주인과 그에 따른 역사적 자취는 문학적 소통 양상의 특징을 구획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매학정 제영시들이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동시에 낙동강 뱃길 연안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매학정은 명승지라는 타이틀과 함께 다양한 방면에서 다각적인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확실하게 구축할 수 있었음 알 수 있었다. 이 위에서 문학적 소통 역시 다양한 양상으로 이루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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