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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오상욱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동방한문학 제73호
발행연도
2017.12
수록면
35 - 80 (46page)
DOI
10.17293/dbkcls.2017..7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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尤菴 宋時烈(1607~1689) 死後 우암을 모신 노론계 사당건립이 전국적으로 논의되면서 1704년(숙종30) 거제의 盤谷書院, 1707년(숙종33) 포항의 竹林書院, 1719년(숙종45) 경주 역시 仁山書院 등이 건립된다. 당시 우암은 포항 長?에서 5년간 謫居하다가 巨濟로 移配되는 과정에 경주부를 경유하게 되면서, 경주의 유림 곡산한씨 등과 접촉하였고, 韓是愈?韓興愈?韓希愈?韓再愈 등의 주도로 우암을 모신 鳳巖影堂을 건립한다. 하지만 鄕士의 남인계 등은 봉암영당의 건립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 봉암영당 훼철사건과 계림사화라는 경주부윤의 당론과 집권세력의 입장에 따라 남인과 노론의 힘겨루기로 지역 유림 간 큰 진통을 겪는다. 당시 한시유의 杖殺사건은 봉암영당 훼철사건과 관련이 깊고, 노론계 입장의 『仁山實記』와 남인계 입장의 「十家契」 등은 당시 계림사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모두가 당시의 상황을 내면에서 설명한 점에서 의미를 가지며, 18?19세기 鄕戰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인식된다. 특히 거제와 포항을 거쳐 경주의 봉암영당 훼철과 鷄林士禍 이후 안동?영덕?울산 등지에서도 경주와 같은 鄕戰이 발생되어 지역 유림 간 갈등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이는 지역발전의 저해와 학문의 침체 등을 야기하였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단지 時流의 한 단면으로 비춰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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