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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심정현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84호
발행연도
2021.11
수록면
161 - 19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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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吾慮舊民轉當羸劣”을 이유로 장수왕에게 守墓人을 略來韓穢로 교체하라고 하였다. 장수왕은 “慮其不知法則”을 이유로 守墓人을 전면 교체하지 않았고, 舊民을 재활용하였다. 舊民을 대상으로 守墓 관련 제도가 제정이 되어있는 점, 舊民이 羸劣될 수 있는 점, 略來韓穢가 法則을 모르는 점에 대해서 당시 광개토왕, 장수왕은 인지하고 있던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광개토왕은 敎言을 하여 守墓人을 교체하고자 하였고,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의중을 알면서도 舊民을 재활용하였다. 이는 守墓人 구성에 대한 두 왕의 입장 차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장수왕은 略來韓穢가 아닌 舊民과 新來韓穢로 守墓人을 구성함으로써 광개토왕의 敎言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 장수왕은 新來韓穢라는 복속 지역의 지방민을 守墓人으로 차출하였다. 이러한 新來韓穢 차출지를 통해 당시 고구려 남방의 지방행정단위를 알 수 있다. 新來韓穢 차출지는 대부분 城 단위이었고, 또한 영락 6년에 정복된 백제 城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한강유역 지배는 백제 城을 기반으로 한 지배였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이러한 지배방식 틀에서 경기 이남 고구려의 관방시설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사실 월평동 유적ㆍ남성골 산성, 경기도에 소재한 도기동 산성은 백제 방면으로 뻗어가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이에 따라 475년 漢城 함락 이후 고구려가 대전까지 진출ㆍ점유했다는 견해, 청원 지역으로 진출하여 일시적으로 남성골 산성을 축조ㆍ사용했다는 견해, 안장왕 친정을 계기로 대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경기 이남 관방시설은 백제의 대응, 백제ㆍ신라의 협력에 장기간 버텨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경기 이남 관방시설은 漢城 함락, 문주왕 피살, 재위 3년 만에 사망하는 삼근왕의 경우에서 드러나듯, 백제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미호천 유역을 잠식한 고구려 군의 주둔소로 여겨 진다. 이후 동성왕 재임 기간 내에 관방시설은 퇴진됐을 것이며, 안성천 유역이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지라고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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