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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정석 (공주대학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108輯
발행연도
2023.10
수록면
373 - 406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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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석곡리 2호분은 묘실의 평면이 장방형이고, 단면 6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판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른바 사비형 석실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연도의 폭이 묘실의 폭과 같고, 길이가 매우 짧다는 점에서 7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고, 주변에 옹관묘가 있다는 점에서 능산리 고분군(부여 왕릉원)과 같은 ‘전형적인’ 백제 석실과는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단순한 지역차가 아니라 새로운 고분 문화가 백제에 유입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고분 문화는 익산 쌍릉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쌍릉이 백제 武王의 무덤으로 볼 수 있고, 무왕은 그 아버지가 ‘용’ 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무왕의 등장은 곧 新王室의 등장이라고 볼 수 있다. 무왕이 계보적으로 그 직전의 法王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新王室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고분 문화가 유입된 것이다.
신왕실의 등장과 함께 새롭게 나타난 고분 문화가 예산지역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신왕실과 연결되던 福信과 같은 인물이 西方城지역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복신은 무왕의 조카였는데, 그랬기 때문에 복신이 활약하던 서방성지역에도 새로운 고분 문화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7세기 백제 지방에는 法王 이전의 왕실에서 갈라져 나온 흑치상지와 같은 인물도 있고, 복신과 같이 무왕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왕실 계열의 인물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석곡리 석실은 7세기대에 백제 지방 사회에 구왕실계 인물과 신왕실계 인물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목차

국문 초록
Ⅰ. 머리말
Ⅱ. 석곡리 고분군의 현황과 특징
Ⅲ. 석곡리 고분군과 백제 지방세력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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