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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낙중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고학회 한국고고학보 한국고고학보 제2024권 제2호
발행연도
2024.6
수록면
283 - 311 (29page)
DOI
https://doi.org/10.47439/JKRAS.2024.2.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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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36호분의 특징을 봉분, 석실, 부장품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이를 대가야, 백제 및 신라의 횡혈식석실분과 비교 검토하여 계보, 축조 주체, 축조 시기 등을 추론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36호분 석실에 반영된 역사적인 의미를 살펴보았다. 특히 백제, 대가야 및 신라라는 주요 정치세력의 변경혹은 완충지역에 존재하는 지역사회의 동향을 살피는 사례로서 다루었다. 유곡리 36호분 석실은 합천 저포리 D-Ⅰ-1호 석실 및 산청 생초 M32호분 석실과 동일한 형식으로 묶을수 있는 대가야 유형 석실의 하나로 여겨진다. 대가야 유형 석실의 등장에는 백제의 영향이 미쳤다. 따라서유곡리 36호분 석실에도 궁륭형 천장 등 백제 석실의 영향이 보인다. 그러나 백제 중앙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축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36호분이 축조된 시기인 백제 사비기 전반의 석실 중에는 비교할 만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유사한 속성을 공유한 석실 유형이 존재하는 것을 통해 대가야 권역의 축조 전통에서 그등장을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고령의 대가야 왕권이 이러한 석실의 조영을 규제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가야 유형 석실의 정형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통해 이를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새로운 석실 조영과양식의 선택에 지역집단의 의지가 크게 반영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유곡리 36호분 석실은 기존 묘역의 범위 안에 조성되었으며, 고령지역의 석실과는 차이가 있지만 대가야유형 석실에 포함되는 점으로 보아 기존에 대가야계 수혈식석곽묘를 매장시설로 사용한 고총 축조집단의 후예가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유곡리 36호분에는 6세기 말의 신라 대금구가 부장되었는데, 운봉 고원 일대가 신라에 점유된 이후 추가장된 인물의 부장품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운봉 고원 일대를 신라가 요충으로 여기고 현지 유력자를지배 아래 두려고 한 모습을 시사한다. 운봉 고원 일대에는 신라 석실이나 석곽이 기존 묘역 내에서 일부 조성되기도 하지만 아직 군집분이 확인되지 않았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가 관산성 전투 이후 첨예하게 부딪치는 가운데 특히 7세기 이후의 이 지역은 군사적인 요충지로서 어느 나라도 안정적으로 지배영역에 포함할 수 없었던 상황이 이러한 현상으로 나타난 것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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