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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도연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112輯
발행연도
2024.10
수록면
45 - 80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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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의 기원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에서도 왕실에서 태어난 왕자녀의 태를 전국의 명산과 길지에 묻는 장태문화가 이어졌다. 이러한 장태문화는 우리만의 독특한 풍습으로,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주요 의례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장태의례를 통해 조성된 태실은 왕실을 상징하는 중요한 시설물로 인식되었으며, 이를 관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태실의 관리제도는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시대 법전에 수록되어 있다. 법전의 내용을 검토하면 태실의 관리를 위해 수호군이 배치되고, 금표 범위가 설정되었으며, 매년 관찰사를 통해 봉심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수호군의 배치는 조선 초부터 확인되며, 외방에 거주하는 품관층이 태실을 시위하도록 하고, 그 아래로 별도의 군정을 편성하여 운영하였다. 이후 『경국대전』의 편찬을 통해 태실간수군이라는 병종으로 법제화되었다. 또한 봉심 제도가 마련되어 지방에 위치한 태실을 관찰 사가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경국대전』의 법 조항은 조선 후기 태실 관리의 근간을 이루었는데, 수호군은 세자의 태실에 2명, 가봉태실에 8명이 배치되었고, 봉심은 태실의 수개, 가봉 시 전례 상고의 과정에서 진행된 사례가 다수 확인되었다. 또한, 태실의 보호하기 위한 금표 범위도 선조 무렵을 거치며 하나의 법식으로 자리 잡아 『속대전』과 『대전통편』에 법 조항으로 수록되었다.
태실이 훼손되었을 경우 엄중한 처벌이 뒤따랐다. 화재가 발생하였을 경우 태실의 수호 인력은 물론 해당 지방관까지 처벌하였고, 태실을 직접 훼손한 경우에는 강상죄를 적용해 사형에 처하는 등 엄형으로 다스렸다.
이러한 태실 관리제도의 운영은 조선시대 태실이 왕실의 상징적 장소로서, 풍수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상징적 장소로 여겨졌음을 잘 보여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조선 전기 태실 조성과 관리제도의 성립
Ⅲ. 조선 후기 태실 관리제도의 운영과 변화
Ⅳ. 태실의 훼손 사례와 처벌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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