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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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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나리타 치히로 (국립순천대학교 인문학술원)
저널정보
제주학회 제주도연구 제주도연구 제62권
발행연도
2024.8
수록면
243 - 264 (22page)
DOI
https://doi.org/10.47520/jjs.2024.6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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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948년에 한반도에서 4·3사건 및 10·19사건이 일어난 과정과 그런 정세가 미군의 오키나와 기지화에 미친 영향을 검토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은 미군의 진격에 대비해 오키나와와 제주도를 기지화했다. 미군은 오키나와를 공격했고 전후도 군정을 실시했다. 전쟁터가 되지 않았던 제주도는 전후도 계속한 일본군의 주둔과 지리적인 이유로 인해 미군의 진주가 늦어지면서 인민위원회가 큰 힘을 갖게 됐다. 전후 초기에 좌파가 우세했던 순천 지역에서는 일제 강점기 경찰 제도를 계승하고 친일적인 우파를 우대한 미군정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됐다. 한편, 미국은 소련의 남한 지배를 막을 목적으로 미군의 장기 주둔을 검토했으나, 점령을 부담으로 간주한 군부가 추후 철군론을 제기했다. 1947년 11월이 되자 유엔 정기 총회에서도 1948년 3월 말까지 총선 실시와 정부 수립 후 점령군 철수가 결의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군정의 대응 등에 대한 반발을 배경으로 4·3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당시 상황에서 ‘공산폭동’으로 간주되어 진압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동족상잔’에 대한 거부감 및 미군정에 대한 반발을 배경으로 일어난 10·19사건도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사건으로 주한미군 철수가 연기되는 가운데 일본의 경제부흥을 통한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원하는 미국은 오키나와를 기지화해 장기 보유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남한의 미군정이 종료된 후에 남한에서의 근무 경험을 가진 미국 군인들이 오키나와의 군정에 관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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