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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은이 (대구광역시청)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117호
발행연도
2025.3
수록면
277 - 312 (36page)
DOI
10.37331/JKAH.2025.03.11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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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나당전쟁에서 고구려의 영역을 거의 확보하지 못하였고 일부 고구려 유민만을 수용하였음에도 신라가 一統三國을 내세우게 된 배경과 그 의미를 살폈다. 그동안의 연구들에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1년(671)조에 실려 있는 「답설인귀서」에 648년 당 태종이 신라 사신 김춘추에게 주기로 한 영역에 평양 이남 고구려 땅이 포함되는지를 살핀 연구들이 많았다.
668년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신라는 적극적으로 고구려 유민을 수용하였고, 670년에는 신라 문무왕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674년에 문무왕은 안승을 보덕왕으로 새로이 봉하였다. 하지만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은 여전히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내며 일본과의 외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아울러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은 681년에 일어난 김흠돌의 반란에 동조하였다. 684년에는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이 주도한 보덕성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따라서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인민을 적극 융합해 나가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문무왕 말부터 신문왕 시기에 신라는 대규모 토목사업에 당의 연호가 새겨진 기와와 비석 등을 만들어 시각화하였다. 이는 신라가 당과의 관계가 개선된 것처럼 시각화하여, 고구려 유민과 백제 유민을 회유하고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신라에서는 자신들이 ‘一統三國’을 이루었고, 당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신문왕 5년(685)에 신라는 9주를 편제하면서 백수십여 년 전에 편입된 한강 유역을 비롯한 중부 지역을 고구려 남부의 옛 땅으로 편제하였다. 이는 자신들의 근거지인 평양 이남 고구려 고지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을 대상으로 한 회유의 성격도 있었다고 파악하였다. 신라는 당과의 관계가 개선되자, 평양 이남 고구려 고지의 성들을 점차 편입해 나갔다. 그리고 성덕왕 34년(735)에 신라는 당으로부터 패강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아 본격적인 개척에 나서게 되었다.
이렇듯 신라는 적극적으로 고구려 유민을 수용하고, 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평양 이남 고구려 고지도 확보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신라의 一統三國은 실질적으로 추구된 당대인의 지향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나당전쟁의 전개와 문무왕의 안승 책봉
Ⅲ. 신문왕대 보덕성민의 반란
Ⅳ. 신라의 일통삼국 지향과 고구려 고지 진출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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