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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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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78호
발행연도
2005.6
수록면
231 - 265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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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친일세력 육성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였다. 일어 보급은 주요한 방편 중 하나였다. 특히 일진회는 일찍부터 각지에 일어학교를 설립ㆍ운영하였다. 1910년 8월경에는 무려 67개교나 운영되었다. 대다수 한국인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이를 수용하는 분위기나 마찬가지였다.
‘을사늑약’ 이후 일어보급은 일본어 수업시간 확대로 이어졌다. 관ㆍ공립학교는 물론 사립 초등교육기관조차도 일본인 교사를 파견하는 등 전방위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당 개량화도 이러한 상황과 맞물러 널리 진행되었다. 식민교육정책은 개량서당을 출현시키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언어동화정책은 당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대부분 서당은 經史를 위주로 한 ‘재래서당’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910년대 국어강습회나 서당 활용에 대한 식민당국자인식은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대부분 개량서당도 이와 같은 성격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식민교육을 지원하거나 보조하는 등 ‘민족교육’은 구호에 그치고 말았다. 이는 일부 현상이 아니라 전반적인 분위기로 조성되고 있었다. 한글이나 한국 역사ㆍ지리 등이 배제된 반면 필수과목으로 일본어를 채택한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일부 자강론자들은 식민교육에 대한 대응책 일환으로 개량서당을 운영하였다. 이는 소수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개량서당의 잠재된 민족의식ㆍ독립정신을 일깨운 사실은 근대교육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3ㆍ1운동은 물론 일제강점기 부분별 민족해방운동에 서당 출신자나 생도들이 동참하였기 때문이다.
3ㆍ1운동 이후 문화운동 확산과 더불어 개량서당은 입학난 구제를 위한 초등교육기관으로 활용이 모색되었다. 사회개조와 더불어 제기된 실력양성론은 ‘교육만능주의’와 직결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논리는 1920년대 문화운동과 직결되어 나갔다. 그런 만큼 식민교육정책에 대한 저항 주체로서 개량서당은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개량서당은 식민교육기관이라는 성격을 보다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개량서당은 민족교육기관과 식민교육기관으로서 양면성을 보여준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일어보급과 개량서당

Ⅲ. 향학열 고조와 학령아동 구제

Ⅳ. 개량서당의 성격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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