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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근대 서방문화와의 접촉은 16, 7세기 예수회선교사들로부터 서방의 과학시술을 접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은 소수의 상층지식계층만이 천문ㆍ역법ㆍ수리 등의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고, 주된 의식의 흐름은 여전히 유가의 가치척도에서 세계를 華夷로 나누고,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서방문화의 본격적인 중국 유입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무력에 의한 강제 개항을 당하면서 향후 100년간의 비자주적이고 수동적인 개방이 이루어진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1. 근대 중국의 서방문화 개방의 목적은 부국강병과 구국생존의 차원이었다. 이러한 강제적 개항은 서방문화와의 교류가 침략과 반침략, 부국강병과 구국생존의 정치적인 성질과 맞물려 국가와 민족의 흥망성쇠와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이러한 存亡의 급박성은 물질과 정신의 괴리라는 첨예한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2. 中西 쌍방의 경제적 수준, 과학기술의 발전, 사회 발전 등의 각 방면의 차이는 상호이익의 평등의 틀이 깨지고, 뒤늦게 중국문화의 낙후성을 인식한 중국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방의 선진문화를 배우고 있다.
3. 그러나, 중서문화의 교류가 확대되고, 西學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양무파를 중심으로 ‘中體西用’이라는 本末의 원리를 도입하여, 서방문화의 유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한국(조선)은 중국과 더불어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면서, 유학이 한국인의 생활방식, 윤리관념 및 정치제도에 깊이 관련되어 있어, 서방문화와의 접촉에서 중국과 유사한 과정을 겪게 된다. 그 특징을 보면:
1. 조선도 서방문화와의 접촉에서 배척에서 강제개항이라는 과정을 겪었다. 비록, 16세기를 시작으로 李?光을 비롯하여, 鄭斗源, 소명세자 등이 서방의 문물을 중국으로부터 가져왔고, 북학파들의 개화에 대한 노력이 있었지만, 쇄국정책을 취하던 보수파 통치집단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이후에, 일본에 의해 강제개항을 당하게 된다.
2. 근대 조선도 중국과 유사하게 불평등의 국제관계에서, 국가 주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문호개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조선반도는 19세기에서 20세기초의 상황은 청나라, 러시아 등의 대륙세력과 일본, 미국, 영국 등의 해양세력간의 쟁탈전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복잡한 정세의 흐름 속에서, 조선은 부득이하게 각종 국가들과 불평등 통상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金玉均을 필두로 한 급진개혁세력은 일본의 명치유신을 모방하여; 金弘集을 대표로 하는 온 건개화파는 중국의 양무운동을 거울삼아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통치세력과 보수의 유생들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하였다.
3. 온건개화파의 ‘東道西器’論은 중국의 ‘中體西用’과 내용면에서 기본적으로 일치하는데, 이것은 양국의 유가문화가 외래의 강세문화에 대한 공통적인 대응방안이었다. 문호개방 이후에, 조선왕조의 통치집단이 취한 일련의 정책 및 문화정책은 이 ‘東道西器’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정신문화와 통치체제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전제주의체제를 유지하면서, 물질문명과 기술문명에서는 서방을 도입하자는 것이었으나, 사실이 증명하듯, 이 노선은 성공하지 못했다.
중한 양국의 근대 서방문화교류의 과정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첫째, 독립성과 자주성을 상실한 외세에 의존한 개혁은 진정한 발전을 가져올 수 없으며, 호혜평등의 원칙에서 상호교류와 협동을 강화하여 공동의 발전을 추구하여야 하며,
둘째, 평화적인 국제환경 속에서 각국 문화의 상호간의 독립적이고, 평등한 교류만이 진정한 세계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으며, 다시는 다른 나라의 주권을 짓밟는 역사의 비극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
셋째, 맹목적인 배척과 숭배는 더욱 취할 것이 못되며, 정확한 판단과 선택을 통해 세계의 흐름에 적응하며, 외국의 선진적인 경험과 성과는 배우고, 또한 우리의 우수한 전통은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