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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朴敏泳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9집
발행연도
2007.12
수록면
357 - 392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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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상설은 1909년 4월 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7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연해주에 도착한 이상설이 가장 먼저 착수한 독립운동 사업이 봉밀산 독립운동기지 개척이었다. 봉밀산에 건설된 한인거주지는 네 곳이 확인되는데, 이상설은 이들네 곳 개척에 모두 관계하였다.
이상설은 연해주에서 항일의병세력 통합에도 노력하였다. 의병세력 통합노력은 한말 의병의 상징적 인물인 제천의병장 유인석과 함께 추진하였다. 1910년 6월 21일에 결성된 십삼도의군은 그러한 통합노력의 소산이었다. 이상설은 십삼도의군의 사무와 조직을 관리하던 실질적 책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설은 유인석과 연명으로 십삼도의군 편성 직후인 7월 28일 황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연해주로 파천하기를 요청하였다. 당시 광무 황제는 여전히 한민족의 정신적 구심체였고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광무황제가 파천하게 되면 국제공론을 환기할 수 있고 국내 인심을 고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삼도의군을 편성하고 광무황제 연해주 파천계획을 수립한 것은 국망 저지를 위한 방략이었던 것이다.
이상설은 1910년 8월 국치에 즈음해 병탄 무효를 선언하고 병탄반대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성명회는 십삼도의군이 국망을 계기로 한 단계 더 발전된 형태로 조직된 것이다. 이상설은 성명회의 활동내용 가운데 핵심되는 선언서를 집필하였고, 대규모 병탄반대 서명록 작성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성명회는 1911년까지 해체되지 않고 존속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목차

1. 머리말
2. 연해주 移居 과정
3. 蜂蜜山 독립운동기지 개척
4. 十三道義軍의 편성과 광무황제 파천계획
5. 聲明會의 조직과 倂呑 반대투쟁
6.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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