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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현숙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51輯
발행연도
2015.3
수록면
101 - 122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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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毓?의 첫 번째 廣開土王碑 연구는 『遼東文獻徵略』에 실렸는데, 광개토왕이 중국 사서의 구려왕 安임을 밝혔고, 17세손을 大武神王부터의 王代數로 보는 설을 제시했다. 비문의 百殘은 백제이고, 수묘인연호조의 城은 丙申 6년에 攻取한 58개 城이며, 國烟, 看烟의 업무는 제사를 섬기는 것이라 지적했다. 그는 이후 『三國史記』를 읽고 광개토왕비를 새롭게 고증한 「高句麗好大王碑考證」을 『靜晤室日記』에 실었다. 이 글은 『奉天通志』에 「晉高句麗好大王碑」라는 제목으로 실렸는데, 고구려가 卽位年稱元法을 썼음을 밝혔고 丁未年의 정벌대상이 倭라고 보았으며.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에 비정했다. 뒤에 『東北通史』에서는 고구려가 광개토왕 14년에 요동을 점령했는데, 광개토왕비에 그 사실이 적혀있지 않는 것은 선조 대부터 燕에 신하로 복속되어 있었던 것을 기피하기 위해서라고 서술했다.
현대 중국학계의 고구려사 인식과 연구계통 및 근간은 金毓?이 형성했다.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흐름 위에 두고 보려는 인식이 가장 대표적이다. 고구려사를 포함한 동북지역 역사에 대한 그의 인식은 일본의 만주 침략 이후 크게 변화되었다. 이런 면은 광개토왕비 연구에서도 나타난다. 1920년대 작성한 「高句麗好大王碑考證」을 1930년대에 「晉高句麗好大王碑」로 제목을 바꿔 수록한 것에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그는 이전과 달리 중국 왕조와 고구려의 관련성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 여기에는 일본의 滿鮮史觀에 대응하여 동북지역을 중원에 예속된 곳으로 규정하려는 목적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김육불의 고구려사 인식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이런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살펴야 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1920년대 김육불의 광개토왕비 연구
Ⅲ. 1930년대 이후 김육불의 광개토왕비 연구에 나타난 변화
Ⅳ. 맺음말
〈참고문헌〉
《中文摘要》

참고문헌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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