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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유재춘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인문과학연구 제47집
발행연도
2015.12
수록면
485 - 515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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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당시 일본군이 서울로 빠르게 진격해 오자, 宣祖는 곧 피난결정을 내리고 북쪽으로 퇴각하게 되었고, 일본군은 서울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평양 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일본군이 격퇴되고, 조선은 다시 서울을 수복할 수 있었다. 서울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가 여러 가지 예기치 않은 고난과 민심 離反으로 인한 심각한 위기를 겪은 선조는 국왕이 절대 쉽게 서울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도성은 너무 넓어서 수비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보다 방어하기 쉬운 한강 북안을 지켜야 한다는 “한강방어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는 1593년부터 제기되었지만 구체적인 방어시설 구축과 防守에 대한 대책은 1595년부터 적극 추진되어 약 5천여 명의 병사가 이곳에 배치되었으며, 한강 방어군 통솔을 위해 설치한 별영이 1600년 이전에 폐지된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한강 북안지대 방어시설 구축과 군사 배치는 수년 이상 계속 운영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광해군 5년(1613) 한강 별영 재설치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 시기까지 한강지대에 배치한 把守軍이 상당 부분 운영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강 지대의 방어시설 구축은 경기도 여주에서 한강을 따라 도성에 이르기까지의 여울지역, 그리고 도성의 동쪽 지대 방어를 위해 목책, 토루를 축조하여 堡壘를 만들었다. 당시의 목책이나 토루의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요충지에 연이어 설치하였던 것은 분명하며, 곳에 따라서는 砲樓를 설치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 아차산성, 수석리 보루, 불암산성이 비록 대부분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지는 관방유적이나 이들 유적지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한성 死守를 위한 방어 조치를 취할 때, 보루가 재구축되었던 곳이다. 유적 발굴과정에서 나타난 이해하기 어려운 유구(시루봉 보루와 아차산 4보루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2중 목책의 성격, 성벽 밖에서 드러난 목책열, 미상의 석렬 유구 등)나 목책 흔적은 조선시대 재사용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며, 아차산 일대에서 망우산을 거쳐 불암산쪽으로 이어지는 지대의 보루나 미상 유구는 임란 당시 도성의 동쪽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현재 한강 북안지대의 성곽 등 방어유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숙지하고 유적조사와 연구에 임하여야 한다. 그 유적들이 삼국시대에 만들어져 사용된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유구에 대한 해석은 조선시대 전쟁시 재사용의 가능성과 그에 따르는 유적의 변형, 그리고 일부 유적은 전혀 고대역사와 관련이 없을 가능성을 두고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서론
2. 임란당시 한강방어론 등장과 방어시설 구축
3. 한강방어시설 관련 유적에 대한 검토
4.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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